이 심심촌빨날리는 황간골짜기에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어도 어느 집구석에서든 배끝에 츄리 하나도 세워놓지 않고, 더더군다나 전기세드는 오색꼬마불은 아모도 켤 생각을 않는다. 그만큼 적막강산인게다.
울 아들놈이 기말고사 끝나자마자 젤 하고 싶었던게 쭝국산 가짜트리에다 장식을 하고 깜박등을 이리저리 걸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드는 일이라 하더만, 시험 끝나자 그 밤에 찬장 위에 올려 놓은 박스를 내려 먼지를 털고 일년을 꼼짝 못하고 접혀 있었던 모조나무가지의 팔을 벌렸다. 그렇게 마루에서 전등을 다네 솜을 붙이네, 반짝이를 걸치네, 은방울,금방울을 매달고 있으니 고스방이 일 나갔다 들어와서는 그걸 기어이 바깥에서도 보이게 창가 쪽에다 놓아야한다네. 좁아터진 마루에 길다란 의자가 놓였으니 팔 벌린 트리가 들어갈 구석이 있나? 창문은 높은데 트리는 키가 작으니 트리 밑에 뭘 공가야 한다면서 그 밤중에 뒤꼍에 나가서 굴러다니는 스티로폼 박스를 주워와 공가도 마땅찮지..저걸 밑에 놓고 올려라, 이걸 더 얹어바라 법석을 떨더니만 결국 창가에 세우지 못하고 에어컨 옆에 짱박아 넣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콕 박혀 있을 들 어떠랴 집 안 어디에 반짝이는게 있다는 사실이.
어제, 크리스마스 이브날, 부러 영동 파리바게뜨까지 가서 케익을 사고 허연 곰돌이 모자를 받아왔다.
밤이 되어 고서방이 들어오고, 잡채를 해서 케익과 먹는다 (니글니글의 극치) 술 먹는 사람이 없으니 와인이 쌓였으면 뭐하나. 니글니글한 속을 컴퓨터 배우는 할아버지가 집까지 와서 갈케조서 고맙다고 주신 배를 깎아 먹으며 달랜다. 어제 배를 받아오면서 옛날 서당훈장이 생각났다. 왜...공부 갈채주면 곡석으로 수업료를 대신했잖여. ㅎㅎ 그걸 다 먹고는 실쩌기 고스방을 쳐다보며, 차 타고 동네 한바퀴하면 크리스마스 기분이 좀 날래나? 했더니 "어디 가고 싶은데?"하고 고스방이 순순히 던져놓은 떡밥을 물어 주는 것이다. 뭐 벨로 가고 싶은곳이 있는게 아이고 그냥 차 타고 얼라들하고 김천이나 가 보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좀 날까해서..했더니, 좀 있으면 <이산>하는데 그걸 봐야하는데...이러는겨. 그래서 아, 새차에 디엠비로 보면 되잖여. 그냥 공원 같은데 차 세와 놓구 온 가족이 이산을 보능겨. 했더니 귀가 솔깃해져서 그럼 가자고 한다.
아들, 딸, 나, 고스방, 이렇게 새 차에 올라타구는 김천으로 가는데 어랍쇼? 잘 나오는 텔레비전이 추풍령 어디쯤 가니까 장면이 멈춰서더니 고만 신호를 잡을 수 없다고 나오는겨. 순간 고스방 얼굴에 낭패감이 스치는 걸 포착하고는, 에이...여기 산이 막혀서 그럴겨 김천 시내로 가면 빵빵 잘 나올겨..하고는 내처 차를 김천으로 몰고 갔겄다. 아이씨, 그래도 잘 안 나오는겨. 고서방은 매번 다니는 노선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차 대가리를 틀어서 달리는데 아이고 어쩌나 점입가경...이젠 아모 신호도 안 잡히고 ...그러다 보니 벌써 이산을 시작할 시간이네. 열시 이분..지금은 선전할거라요 쪼매만 더 가봐요. 열시 십오분..드뎌 고스방 입에서 욕이 나오기 시작한다. 씨이팔 황간보다 여긴 시낸데도 더 안 나오네. 김천 좋다카더니만 좆이라그래. 이것도 안 나오는데 좋기 머가 좋아 씨,씨,씨, 펄, 펄, 펄....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과 고스방 옆자리에 앉은 나는 괜히 나오자 했다면서 마음이 불편하다. 우리의 살살이봉 아들내미는 아빠 그럼 넓고 높은데로 가봐 혹시...하니까 고스방은 냅다 차를 공설운동장쪽으로 돌려서 달리기 시작한다. 열시 이십분...거길 가도 안 나온다. 그러다 고스방 퍼뜩 생각난 장소가 있는지 강변 도로쪽으로 접어 들어서 달리는데 찌지직 소리가 난다. 아이고 반가운 전파야...어디갔다 이제왔니...조금씩 티비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산도 보이고 대수도 보이고 옹주도 나온다. 앗! 나온다 아빠.
또랑인지 공원인지 하여간 둔치 높다란 길 우에 어정쩡하게 차를 세우고 우린 이산을 끝까지 봤다네
그나마 그거라도 안 봤으면 눙깔 돌아가고 씨씨씨 연발인 불편한 운자씨 옆에서 우린 얼마나 쫄아야했을까. 다 좋은데 고스방...내년에는 그 승질 좀 죽이고 가족들을 편안하게 해 주게나
나, 싼타에게 받을 선물 딴거 없이 그거나 받았으면 좋겠어.
잘자...고스방.
이렇게 살짝 기도하면서 머리가 방바닥에 닿자마자 코골며 잠드는 불편한 고스방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즉히 빌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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