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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

황금횃대 2008. 5. 28. 21:14

오후 들어 비가 서서히 그쳤다.

방바닥이 눅눅하고 차가와도 빗소리가 듣기 좋아 사방 창문을 열어 두다.

마당 세멘바닥에도, 아랫채 양철 지붕에도 빗소리가 시원하다.

뒤안 감잎사구 위에도 들이치는 빗방울이 힘차고, 췻덩 너른 잎 우에 떨어지는 빗방울도 장엄하다.

오랜만에 맞이 하는 것은 이리봐도 이쁘고 저리봐도 아름답다.

아침 설거지와 청소를 마치고, 뒤안에 있던 빨래 건조대를 방으로 끌어들여 빨래를 넌다

그러고는 터덜터덜 장화를 신고 밭으로 간다.

산비들기에 까치들이 극성이라, 콩을 심어 놓으면 하루를 못가서 날콩을 발가락으로 파헤쳐 다 파먹는다.

작년에는 콩을 모종해서 심었더니 노루가 내려와 여린 잎을 다 뜯어먹었다.

사람사이에도 부대끼며 사는게 힘이 들어 똑 죽겠구만, 이젠 산 속 짐승도 사람의 터전까지 내려와 극성을 부린다.

어제는 포도밭에서 포도순 결속을 하는데 고스방이 저녁 여섯시가 넘어서 전화를 해서는

"지금 모를 심으려하니 빨리 논으로 오라"한다.

상욱이 애비가 봄볕에 반들반들하게 끄실려서 모를 심으려고 이양기에 모판을 얹고 있다

태풍에 쓰러지지 않는 키가 작은 벼품종을 선택했더니, 키운 모도 난쟁이 똥자루만하게 짧다

저걸 심어 놓으면 또 다 삭아서 쌔빠지게 모머들여야 되는거 아닌가..잠시 생각이 깊다

음료수를 사오네, 빵을 사오네, 담배를 낑가오네..하며 잠깐 요기 될 것을 사 오는 동안

고스방은 아침에 너무 많이 잡은 물을 빼내느라 삽으로 물꼬를 트고 있다.

논이 제대로 고르게 써래질이 되지 않았는가 이양기 발통이 울통불퉁 튀고 모가 심겨 나가는 줄이 삐뚤빼뚤하다

뭐래도 모 심어 놓고 이쪽 귀퉁이 논둑에 앉아 저쪽 끄뜨머리로 쳐다보면 줄이 그린 듯이 쪼옥 골라서 간격이 일정하게

초록색 어린모가 심겨져 있으면 그것도 보기 좋은 일인데, 급하게 하는 일이라 모양새는 따질 겨를도 없다.

다~아 내 손으로 하는 일이 아니고 넘의 손에 농사를 맡기니 그렇다.

 

8시 반이 되어서야 모심기가 끝났다.

배달 되어 농로 위에서 끓고 있던 버섯찌개가 부르르르 한 번 넘칠 때 함평 나비농장에 체험학습을 떠난 상욱이도 오고

상욱이 에미도왔다.

시집 와 보니 신랑 나이가 자기보다 11살이 많더란다.

낭만적으로 생각한 농경 생활이 일에 파묻혀 죽을지경에다가 오늘도 놉 얻어 고구마 심고 왔다면서 발바닥에 불이 난단다

볕에 모자도 안 쓰고 반팔 티셔츠를 입고는 둘째를 임신했는지 배가 불룩하다.

나는 무릎나온 보라색 몸빼바지차림이고 아직 서른이 안 됐다는 상욱이에미는 꽃분홍 무릎이 튀어 나온 몸빼바지를 입었다.

나도 저 나이때는 맨 얼굴 그대로 내놓고 다녀도 별탈 없었는데 늙은 이즈음엔 싸자매고 또 싸잡아매도 잡티가 돋아난다.

여덟시 반이 넘어 가자 간당간당하던 저녁빛도 사라지고 어둠이 왔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상욱에비와 그의 처, 그리고 영국신사 고스방, 그의 예펜네 상순이가 농로에 퍼대지고 앉아 저녁을 먹는다.

영국신사는 기어이 제 차까지 걸어와 스포츠 신문을 가져와 깔고 앉아 밥을 먹고 다른 사람들은 맨땅에 퍼대지고 앉아서 먹는다.

렌턴을 차에 걸어 조촐한 밥상에만 겨우 불빛이 보이고 모판을 만지고, 논둑에 풀을 매던  흙 묻은 손으로 그냥 숟가락을 잡는다.

문득 고흐의 그림이 생각난다

흐릿한 불빛 아래 검은 손으로 감자를 먹는..

어찌보면 처량 천만의 그림이지만 상욱이 애비는 연신 작은 아이를 쳐다보며 싱글렁벙글렁이다.

"야~! 옛날 생각난다. 옛날에는 마당에 모깃불 피워놓고 멍석 깔고 저녁 먹었는데..보리밥 물 말아 먹고 하늘 쳐다보면 별이 어찌나 많던지..."

육신의 고단함을 잠깐 뒷자리에 물려 놓은 상욱이 애비의 눈길이 아득해진다.

 

 

 

 

비도 그치고 아침 나절 물 들어 가라고 열어 놓은 비닐도 덮을겸 저녁을 먹고 다시 밭으로 갔다.

실금실금 풀도 쥐어 뜯고 하다가 나흘 전에 심고 남은 콩을 가져와 모를 더 부어놓는다.

하나라도 더 심어 놓으면 백개도 넘는 콩을 돌려 주는 땅이다.

옛날 같으면 그거 한 말 사먹고 말지..했을터인데, 들추는 신문마다, 틀어제끼는 티비 뉴스마다 먹을꺼리 걱정이요, 쪼들릴 살림 걱정들이다. 새가슴 여편네는 적게 먹을 생각은 안 하고 하나라도 더 심을라고 용을 쓰는데

 

산 우에 비얄밭에는 아랫마산리 정씨아지매가 나랑 마찬가지로 도라지밭을 맨다

한 여름 저 비얄밭에는 아침마다 보라색 웃음이 자지러지게 터져 나올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