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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박라연 外

황금횃대 2009. 3. 23. 22:00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 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멘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땀 한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산벚나무를 묻지 마라


임 경 림



늙은 산벚나무가 온 산을 먹여 살리고 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벙어리 부처를 먹이고, 벌떼 같은 하늘과 구름을 먹이고, 떼쟁이 햇살과 바람과 새를 먹이고, 수시로 엿듣는 여우비를 먹이고, 툇마루에 눌러앉은 한 톨의 과거와 할미보살을 먹이고, 두리번두리번 못 다 익은 열매들의 슬픔을 먹이고, 애벌레의 낮잠 끝에 서성이는 노랑나비를 먹이고, 먹이고......먹이고,

흘러 넘친 단물이 절 밖을 풀어먹이고 있다 젖무덤 열어젖힌 산벚나무, 무덤 속에 든 어미가 무덤 밖에 서 있다 퉁퉁퉁 불어터진 시간이 아가 아가 아가를 숨가쁘게 불러댄다

산벚나무를 묻지 마라
코 닫고 눈 닫고 귀 걸어 잠그고
문둥이 속으로 들어간 절 한 채
어두워지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