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보니 새삼스럽군. 벌써 세금 고지서 정리해서 은행 문턱을 넘어야 할 날이 가까와졌어.
오월 행사 계획서도 오월이 이미 시작되고서야 이것 저것 들춰보며 제사에 생일에 생신에 모임에 회의에 주섬주섬 네모칸 안에다 메꾸어 넣구서는 냉장고 문짝에다 자석으로 붙여 놓고는 그거 들여다 볼 사이도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갔네. 마음 한 켠에 한 번씩 저녁 노을같은 물이 들었을법도 하건만 어찌된 셈인지 오래 기억이 되지 않아. 여기저기 받은 전화 중에서도 젤 마음이 아픈건 공주님의 소식이였지.
지나고 나면 그걸 뭣하러 가슴 쥐어짜며 아파하고 울어줬나 싶어. 그렇지만 그 당시 내게 그 불청객이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걷잡을 수가 없어. 천지가 내 마음에 들어 앉았고, 내 마음이 천지에 스며들어 있으니 여길 닫았다고 거기까지 막아지는 건 아니지. 그래, 마음에 바람이 들면 천지간에 회오리가 지나가 흔적이 남지. 그래서 또 울고, 막 슬프고, 새록새록 꺽꺽거리는거지. 그렇지만 공주님, 그것도 지나가는 것이라,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잖아. 조용히 기다려봐요. 우리가 만날 때마다 얘기한 선물 있잖아. 그걸 준다네. 세월이 주는 선물.
지난 주말에는 고등학교 동기 친구들 아홉이서 경주에 갔지. 자신의 승용차로 마구 원정에 나서도, 혹은 신랑의 승용차를 사용할 수 있는 허락이 쉽게 떨어지는 나이가 되었다네. 조용하고 깨끗한 동네, 신록이 뭉개구름처럼 피어나는 그곳에서 우린 지붕이 소잡도록 얘기하고 눈물이 질금질금 나도록 웃었다네, 검실검실 쳐들어오는 졸음을 입이 찢어질 듯 웃는 웃음 소리로 막아내면서 우린 시간을 견뎠지. 그럼 그렇지, 오래된 이야기는 결코 쉰소리가 아니였어. 웃으면 건강해진다는. 다른 일로 새벽 네시까지 그렇게 버팅겼다면 다음 날 기절하였을터인데 밤새도록 웃었으니 엔돌핀이 피톨마다 전달이 되었던가벼. 그 담날도 쌩쌩했다지.
경주 남산에도 갔었단다. 헥헥거리며 올라가서는 약사여래불 부조 딱, 하나만 보고왔지. 세 분의 약사여래가 약 단지를 손에 들고 앉아 있는 모습. 거기서 한 숨 몰아 쉬고는 바로 내려왔네. 포석정에도 들러서 옛날 중딩 때 수학여행 왔던 현장을 기억으로 피어올린다. 알라딘의 램프처럼 기억은 몽실몽실 연기를 살짝 허리에 두르고 내 머리 속에서 활짝 펼쳐졌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포석정. 전복 뒤집어 놓은 모양의 가장자리 물길을 따라 술잔이 한 번 회전을 하면 그 자리에 앉았던 신하가 일어나 술잔을 마시고 시를 한 수 지었다는.
지금은 마른 먼지만 풀썩거린다. 녹음은 누대의 시간을 걸쳐 피었다 짙어졌다 떨어졌다 사라졌다..
여자 아홉이 모이면 각자가 하나의 꼬리만 장착해도 다 모으면 꼬리가 아홉이여. 옛날 옛날 순발력 휘날릴 때야 앉은 자리 다지기 전에 또 다른 행선지로 발길을 돌렸는데, 어찌된 셈인지, 아홉의 꼬리가 날렵의 시대를 지나 이제 무거운 시대가 왔나보다. 경주 도착해서 점심먹고 바로 펜션 들어가서는 다음 날 짐 챙겨 나올 때까지 현관문 밖을 한 번도 안 나간 여편네들도 있었으니, 그 꼬리의 무게가 천근을 호가 하고도 여덟근 초과라.
촌구석에는 요즘이 젤루 바뻐.
모도 심어야지, 모만 심으면 되남? 모 뗌빵도 해야지, 포도순 질러야지, 봇도랑에 도구도 떠야지, 자고 나면 뼘가웃씩 자라는 풀도 매야지, 콩 모도 부어야지, 부지런한 집은 벌써 고추모도 다 심고 지줏대 세우느라 팔다리가 뻐근한데 우리는 맨난 두 템포가 늦어, 이제서야 고추모를 사고 비닐망을 씌우고, 여불때기 남은 땅에 옥수수를 심고, 고구마 심을라고 고구매 순도 두어단 갖다놨네. 넘들은 벌써 고추꽃이 핀다덩만..
빗자루 몽뎅이도 할 일없이 누워 있을 시간이 없어. 들락거리는 문짝 귀퉁이 공가놓는데 쓰느라 그녁도 하루 종일 고단하다네. 저녁이나 되어야 빗자루를 눕히고 문을 닫고 농부들은 잠을 청한다. 근데 나라일 보는 사람들은 뭔 지랄들인지 이 바쁜철에 무슨무슨 행사를 한다고 사흘들어 인원동원이다. 예산 조기 집행하느라고 말단 공뭔들은 똥줄이 빠진다.
바빠서 죽을래야 죽을 시간이 없다던 사람들도 말로만 그러지 너무나 능청스럽게 하루하루 농사절기에 맞는 일을 맞춰내고 있다. 그 와중에도 밥숟갈 들기 싫은 사람은 세상을 뜬다.
나는 북새통 속에서 밥숟갈을 힘차게 들고 밥을 퍼 먹는다. 국에 넣고 남은 단배추 잎사귀를 푸르게 데쳐서 쌈을 싸 입이 미어지게 한 숟갈 오지게 퍼넣는다. 왜? 살려고.
옛날 루피나 수녀님은 틈만나면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내게 얘길 했지만, 이젠 어떻게 사느냐란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 눈 앞에 엎어지는 것들을 걷어 내고, 들어 올리고, 곧추 세워놓으려고...닥치는대로 산다.
아침에 일어 나려면 지구 덩이가 내 어깨에 얹힌거맹이로 몸이 무겁지만 그래도 일어난다. 그녀르꺼 지구덩어리 번쩍 들어 올리지 못하면 내가 무릎꿇고 OTL자세로 한참 버팅기면 지구 반대편으로 나는 들고 있는것이니.ㅎㅎ
그렇게 오월이 가고 있다.
아카시아 몰핀향기도 공기 중에 흩어지고, 오래된 능구랭이도 기와담을 슬슬 넘어가고, 아들놈 생일날에 케익도 하나 안 사주고 은근슬쩍 열여덟의 청춘이 넘어가고 있다. 그렇게 인생은 넘어가는 것이라고.
공주님아.
슬픈영화 상영은 이제 고만하고 슬슬 기운차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