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좋은 징조다.
이렇게 선득선득 바람 불고
짜개지게 달린 앵두가 요염함 붉은 이슬을 매달았을때
진정한 농사꾼은 쉰다.
어설픈 농사꾼들은 이런 날 시원하니 일하기 좋다고 서둘러 새벽별을 등에 지지만
나는 논다.
넌출넌출 콩모가 자라고
박카스병에 넣어 톡톡 쳐서 구멍마다 심어 놓은 참깨 복토도 해야하지만
논다.
진정한 농사꾼은 땡볕과 승부를 한다.
겹겹히 세월의 치적을 구분지어주는 목덜미에
바탕은 그을음, 주름선은 살색으로
산뜻한 스킨을 만들 수 있는 계절도 오로지
땡볕, 계절, 여름이다.
어제 축구도 이대빵으로 이겼으니 더욱 더 놀아야지
면사무소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면사무소 앞면 유리창에 큰 보재기를 팽팽히 잡아당겨 묶어서는
큰화면으로 경기를 봤다.
급하게 골뱅이 소면을 만들어서 스쿠터 뒷바구니에 양푼이째로 싣고가
기정이 삼촌이랑 오랜만에 브라보! 땡괌을 지르며 생맥주를 마셨다.
뭐라 말 할 수 없는 생맥의 원초적인 맛.
10시쯤 고스방이 전화가 왔다.
누가 급하게 대구카톨릭병원을 간다는데
대구 지리 밝은 여편네가 같이 가줬음...하고
손님을 태워 고속도로에 올렸는데 급하게 전화가 온다
손님은 초딩 동기모임을 하다가 동생이 병원에 119로 실려갔다고 가는 길이다.
연신 전화벨에 병원, 동생, 환자...이런 말이 오고가더니 갑자기 목적지가 바꼈다.
"성주 혜성병원으로 가주세요"
친절한 운석씨는 곧바로 김천나들목에서 차를 내려 성주로 향했다. 그 옛날
내 고모 돌아가셔 합천가는 길에 거쳤던 성주 가는 길.
깜깜한 밤에 노란 참외가 익어가는 하우스가 길 옆으로 사열을 선다.
손님은 내려 병원으로 들어가더니 한참만에 나왔다.
실연당한 막내 동생이 농약을 먹었다고
그런데 전화받은 내용과는 달리 손님의 동생은 멀쩡했다.
팍팍한 삶의 여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강퍅한 얼굴이다.
움푹패인 팔자주름은 나이보다 몇 정거장 더 지나친 얼굴이다.
손님은 동생을 차에 태워 대구 병원으로 데려가려하고
동생은 짧은 억양으로 사연을 끊어내며 탑승을 거부한다.
그러다 형되는 손님이 동생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친절한 운석씨가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서 손님을 말린다.
나도 내려서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동생을 설득한다.
겨우 동생을 태워서 수륜면으로 간다. 묘한 밤의 어둠색, 길가의 가로수는 정갈하게 다듬어져
유월의 푸르름을 공기중에 내뿜는다. 밤인데 어떻게 푸른지 아냐고?
그걸 모르면 바보지 안그래? 바보가 아닌 우리는 손님이 동생을 걱정하는 대사를 듣고 집구석 역사를 단번에 파악한다
상철아,
니가 그카면 우야노. 자슥들을 생각해야지. 지나간 일들은 다 잊었뿌라. 이미 일어난 일을 붙잡고 니가 이렇게
좌절을 하고 있으면 보는 이 형의 마음은 어떻겠노. 우리가 부모 잘 못 만난 죄밖에 더 있나..아무쪼록 니가 마음을
단단히 묵어야지. 나도 니 형수 지금 입원 시킬리고 청주 병원에 델다놨다. 거기도 가봐야하는데 너까지 이라면 이
형은 우째살란 말이고. 어요, 이제 이자뿌라...
막내 동생인가보다. 본처와는 이혼하고 아이 둘은 본처가 거두는 모양이다. 벌써 세번째의 여자를 만났지만 수륜면에서
만났다는 그 여자, 얼마 살지도 않고 시누집(그러니까 손님의 누나집)에서 패물을 챙겨서 달아났다네.
내 사는게 이러니 느그들 어려운거 도와주지도 못하고 미안하지만, 어쩌누..사는게 팍팍하니..
손님의 눈에서는 금새 눈물이라도 어룽질것 같다. 그래도 잘 참아내신다.
수륜면에 차를 놓고 왔다는 동생을 날이 바뀐 시간에 차 앞에 내려주고 단단히 마음 다짐을 시킨다. 술 깨거등 차 가지고 집에 가그라
아니면 내랑 같이 자고 내가 차 운전해줄까? 그만 됐다고 모든 것을 밀어 내는 동생.
아! 맏이가 뭔 죄란말인가.
축구는 이겼는데
그 손님도 동생일 아니라면 온 국민이 두 팔 들고 좋아하는 그 기쁨에 동참할텐데
손님은 온통 마음이 동생의 거취에 가 있을 뿐이다.
누가 그러더군.
온 국민이 해방 만세야! 해도 딱 한 사람.
해방 웬수야 하는 사람 있다더니.
사람의 일이란 100 이 다 좋을 수는 없지.
그나저나 어젯밤
잠 한 숨 못 잤을 그 남자, 맏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