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으스름이 내린다
불을 켤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어둠은 1도 더 깊어진다.
저녁을 해야지... 엉덩이를 들고 일어난다. 낮에는 콩나물밥을 해서 한 끼 떼웠다. 콩나물밥에는 동치미가 제격이다
맛난 양념간장에 살폿 맛들은 김치를 종종 썰어 넣고 고소한 김을 한 가득 넣어서 살살 비벼먹는 콩나물밥.
아버님은 콩나물밥을 참 좋아하신다. 콩나물밥이 동치미와 궁합이 맞는 거란걸 뻐히 알면서도 올해 동치미는 엉망이다.
무우 동실동실한걸 진눈개비 오는 날 소난곡 인식이 이장님댁에서 뽑아와 손질 할 때까지는 맛있는 동치미 먹을 생각에 신이 났다. 그러나 그 다음 과정부터는 진도가 안 나갔다. 김장봉투에 무를 넣고 굵은 왕소금 몇오큼 넣어 흔들어 놓을 때까지만해도 맛난 동치미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 날 통영을 가는 바람에 베렸다.
통영 갔다오니 무가 거무튀튀해졌다. 에라이 바깥으로 꺼네 큰 독에다 봉다리째 집어 넣고는 소금물을 내려 물을 부었다.
그러고는 거기다 갓이며 절인 배추, 배, 쪽파에 지고추, 마늘생강 양념을 정말이지 정성으로 짱박아 넣어야하는 과정을 단지 하기 싫다는 이유를 들어 방치했다. 오늘 문득 생각난 듯 장독 뚜껑을 열어보니...ㅎㅎ 그래도 무우는 동치미 분위기다 푸른색 대가리 부분이 노르스름하게 삭았다.
무만 꺼내 썰고, 배추 넣고 사과 배를 넣어서는 나박김치로 변신을 시켰다. 숟가락으로 뿌스름한 풀물 국물을 떠먹으니 그냥그냥 먹을만하다. 이 없으면 잇몸이재, 동치미 망했으면 나박김치로 대신하지뭐. 사람 살이, 살림이란게 어디 한 구멍 밖에 없을라구, 이 구멍 빼서 저 구멍 틀어 막고 그런 재미로 사는거재.
저녁에는 무 나물을 볶는다. 큰 무를 하나 껍질 벗겨 깎아서는 깨깟하게 씻어 세 등분을 한다. 잘 벼린 칼을 들고 세 등분한 무 둥근 부분을 엎어놓고 얇게 썬다. 얇게 썰린 하얀 무가 역동적으로 도마 우에 눕는다. 차곡차곡 계단식으로 눕는다
왼손으로 드러 누운 무을 앞부분부터 눌러주며 제압한다. 제압하면서도 손가락은 옴씰옴씰 칼이 움직이는만큼 뒤로 물러 앉는다. 이 대단한 테크닉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일밀리미터 혹은 일점오밀리미터의 굵기로 무 채가 썰린다. 투명한 살들이 유리막대처럼 쌓인다.
보
ㄲ
느
ㄴ
다
배추나물, 무나물이 나란히 하얀 보시기에 담겨 밥상 우에 오른다.
별다른 치장이 없어도 재료 자체가 익어서 내는 빛이 부드럽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