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쏟아지고 난 후
아마 해가 바뀌었재요
참말로 억수같이 눈이 쏟아진 날이였습네다.
실물 늘어선 꼴을 보면 구질구질하기 그지없는 촌구석 살림인데도
내리는 눈이 살짝 가려주는 풍경은 알록달록 천연색의 <이쁜 놓임>입니다
그러고는 새해가 왔습네다.
새해가 와도 여편네의 삶은 변함이 없습니다.
무국을 끓이거나 무 생채를 한다거나, 이제 익기 시작하는 김장김치통 밑바닥의 무를
깊숙히 손 찔러내어 찾아낸다거나...
여전히 무와 같이 서로의 목숨을 나눕니다.
고스방은 일 년 내도록 무말랭이 무침 반찬이 먹고 싶은가 봅니다. 오늘 낮에
제주무 한 박스를 사왔습니다. 한 개 천 팔백원짜리라면서 혹시 나한테 혼날까바
저렇게 칼도마 갖다놓고 직접 무를 썰고 있재요
비단고름 같다던 고스방 손도 많이 늙었습니다.
그도 세월의 누적을 막을 수 없었던게지요. 손가락이 많이 굵어졌습니다.
처음엔 굵기가 좀 거시기하더만 한참 썰더니 모양이 좀 낫네요
동가리 무를 하나씩 맛보다가 뒤에 앉아 티비 보는 아부지한테도 무를 갖다 드립니다
"아부지 이거 함 잡솨보이소. 배같이 연하고 맛있네요"
이빨이 션찮은 아흔 둘 되신 울 아버님은 저녀르꺼 무 한번 시원하게 버썩 깨물아 먹어보는게
소원이십니다.
무 한 박스 썰어 놓으니 어지간히 다 차네요
저걸 이제 벌크에 말려서 무말랭이 만들거래요
고스방은 점점 세세허니 아지매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