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의 달인까지는 아니더래도
그냥그냥 반찬만드는 일이 그닥 어렵지않는 나도
김치 담그는 것은 어렵다.
그걸 왜 어려워하느냐하면, 어렵다기보다 껄끄러워하냐하면
갖다설라믄에 또 이야기는 어머님 살아 생전으로 올라간다.
친정 엄니는 반찬을 뚝딱, 뚝딱 도깨비방망이식으로 만들었다.
허기사 어려운 살림에 일을 하러 다녔으니 그 동당거리는 발걸음을 이제야 짐작을 하지만
그 와중에 여섯식구 먹거리를 정말로 번갯불에 콩 궈먹듯 후다닥 만들었다
그래도 참 맛있었다. 나으 요리도 매번 그런 식이다.
고명얹고 예지랑시럽게 배추잎사구 치마 들시듯 한 장 한 장 들셔가며
속을 정성껏 넣던 시어머니의 요리법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울 엄마의 벼락김치는 젓갈이든 고춧가루든 마늘이든 뭐든 대충이였다
찔끔 부어넣고, 설설 뿌리고, 디글디글 알맹이 겨우 면한 마늘들이 들어갔다
반면에 시엄니는 마늘도 지겹도록 착, 착, 찧어서 넣고
젓국이며 간 맞추기를 열 두번도 더했다.
나는 옆에서 바라만 봐도 질릴 지경
시어머니와 김치 담고 난 뒤 어머님이 최종 맛을 보라고 한 줄거리 떼주시면
나는 기어이 그걸 물리쳤다. 열 번도 더 본 간을 마지막도 또 봐?
울엄마의 김치는 싱거우면 싱거운대로, 짜면 짠대로 딱 한 번 맛보면 그만이다.
싱겁다고 말하면 "음식은 싱겁게 먹어야 몸에 좋다"면서 넘어가고
"아이고, 왜 이리 짜게 담았시유?"하면
"좀 짜야 음식이 맞지다"(받침이 맞나? 헤프지 않고 마디다 할 때 그 맞지다란 말-갈수록 한글이 어렵다)
이러면서 음식 간에 대한 불평을 원천봉쇄했다.
나는 엄마에게 그렇게 은연중 교육을 받았다.
음식에 정성이 들어가야지..뭐 이런 멘트는 절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벼락치기 음식이 대부분이다.
아침에 밭에 가기 전에 배추 세 포기 뿌리 뭉텅 잘라내고 절여놓구선
점심 먹으러 와서 한 번 디비고 다시 밭에 가서 일하다가
저녁 하러와서 씻어 건져놓고
동네 형님집 텃밭 가서 전구지 한 오큼 낫으로 베와
후다닥 담금 김치
친정엄마표 멸치젓, 그거만 있으면 김치는 오케이.
젓갈냄새 풍풍 풍기는 갓담근 김치 보자면
찬밥 생각 저절로 나지. 척,척, 밥숟갈 우에 교양없이 걸쳐 먹는 ㅎㅎ
어머님 돌아가시고 그 해 담은 장은 시고모님들이 와서 떠주셨다
원촌 세째 고모님은 간장을 얼마나 매 달였던지 두 말 물 잡아 담은 간장을 1/4로 졸여놓으셨다
간장색이 어찌나 검던지 숟가락 가자, 정이 안 났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시고모님이 나 생각해서 거들어주신다고 그리 하신걸.
장독 마다 묵은 간장이 반, 혹은 1/3씩 들어 있어 그 이듬해는 장을 담지 않았다.
어머님 계실 땐 간장 재고가 많아도 꼭 장을 담았다.
그런데 안 계시니 그것도 내 맘대로 조절이 된다.
올해는 맘 먹고 작년 겨울에 햇콩으로 메주 서말을 쒀서 친정에 메주 두 장 주고
나머지 다섯장으로 장을 담았다.
소금도 농협에서 파는 것 말고 [마하탑]이란 천일염 파는 곳에 직접 주문넣어
깨끗하고 포슬포슬한 소금으로 담았다. 기대가 컷다
두달이 지나고 장 담은 곳에 하얀 찔레꽃이 피었다.
뜰 때가 된거다
아버지랑 둘이서 장독간을 청소하고 메주를 건져서 치대고
솥단지를 걸어 아부지가 불을 때서 장을 달인다.
적당한 때에 불기를 거두고 한 김 나간 장을 여과천을 소쿠리에 얹어 장을 밭쳐가며
오짓독에 붓는다. 백년이 넘은 우리집 장단지.
이제 간장, 된장은 또다른 숙성의 경계를 넘어간다
아버님 영동병원에서 4시간 투석하실 동안 나는 바느질을 한다
알록이 달록이 천조각 챙기고.
퀼팅솜과 작은 가위,
바늘과 실을 봉다리 넣어서
아침 아홉시에 집에서 나가면 오후 3시에 집에 도착한다.
아흔 두살 아버님도 봄볕을 견디고
졸졸 따라다니는 나도 봄볕을 견디고
시간을 깔고 앉아 기다리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끝이 날 일.
그날까지의 기다림이 찐득찐득 고약처럼 농축되지 않고 하염없이 엷고 옅어지길 바라며
나는 바느질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