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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황금횃대 2014. 2. 21. 21:07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짓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고형진 편『정본 백석 시집』(문학동네,2007)

 

 

 

 

 

 

 

 

 

저리 맹렬히 타는 것 옆에 있으면 논바닥도 넙데데한 내 얼굴도 온통 고추장 버무려 놓은 듯 붉어 진다

종일 포도전지 한 것들을 아름아름 안고 와서 논바닥에 부려 놓고는 뿍데기를 걷어와 나무 더미 밑에 꾸셔 넣고 불을 지핀다. 불은 쉽게 붙지 않고 눈물 콧물 두어차례 찰지게 뽑고 나면 그제서야 타닥타닥 붙기 시작하여 뽀얀 연기를 뭉텅뭉텅 몇 번 더 내지른 다음 화라락 피어 오른다. 보름날 쥐불놀이 낫게 해본 촌구석 위인이라면 그까잇 불 붙이는게 뭔 큰일이겠냐마는 어줍잖은 도시 빈민으로 살다 촌구석으로 시집 온 나는 불 지피는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그러니까 이십 오년 전, 대구에서 용달차에 보따리보따리 생색도 안 나는 책만 주구장창 화물차에 싣고 시집 온 나는 연탄 보일러도 설치 되지 않는 작은방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 시부모님과 같이 사는 것이니 짜드라 살림 살이를 해 올 필요가 없었다. 달랑 전기 밥솥 하나와 십사인치 티비 하나만 들고 오고 나머지는 모두 소설책과 동인동 헌책방에서 알뜰살뜰 사서 모은 헌책 박스와 보따리 뿐이였다. 뭐 이런 살림 이야기하자는게 아니구, 보일러도 없는 내 방에 저녁마다 불을 때야 했는데 생전 장작 불 지피는걸 해 본적이 없는 나는 불 붙이는 것 부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첨에는 고스방이 일 나가기 전에 시범삼아 불을 몇 번 지펴주더니만 얼마 안 있어 그건 내차지가 되고 말았다.

 

작은 잔가지를 동개동개 얹어 놓고 눈물 반 콧물 반 매운 연기에 껌정 수염을 그려가며 불을 붙여 놓고, 이쯤이면 장작 넣어도 되지 싶어 몇 개 포개 놓으면 불씨는 시름시름 앓다 죽는 병든 달구새끼처럼 까무룩히 죽어버리는 것이다. 아이고 그 억장 무너지는,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눈물겨운 풍경이라니.

 

그러면서 세월은 흘러 개죽 끓이고, 메주 끓이고, 장 달이고, 수정과 고고, 두부 맹글고, 고추장 담글 조청 고아내는 사이 나도 불 붙이는 실력이 많이 늘었다. 눈물 콧물 빼지 않고 손바닥이 까마귀 할애비처럼 숯검뎅이가 되지 않아도 활활 속 씨원한 장작불을 지필 수가 있었다.  능숙해지자 세월은 십년, 이십년을 우습게 건너 뛰고, 불을 지피며 애증의 세월을 같이 했던 시어머니도 세상을 버리셨다.

 

일만 시간의 법칙이 내게도 통했던가. 논 바닥에 쌓아 놓은 나무가지에 불 붙이는 것도 그 옛날 새댁이 시절보다야 장족의 발전을 했다. 시절도 더불어 좋아져 즉석에서  타오르는 모닥불을 사진으로 냉큼 남길 수도 있게 되었다.

확확 열기가 뻗쳐 나오는 불 가에 쪼그리고 앉아 타다 남은 가지를 불구덩이 속으로 집에 던지다보면 이런 저런 생각이

불 속으로 던져 지기도 하고, 불구덩이 속에서 덜 살라진 생각들은 다시 뜨겁게 달궈져서 나를 덮치기도 한다.

 

덮친 것들은  콧물로 재생산 되기도 한다, 후울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