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재촉하는 비 걸음이 종일 바빴다, 바쁘다못해 발목이 접질리게 모퉁이를 돌았는가 뒤안 처마 밑으로도 빗물이 흥건하다
어제 신협 조합장 선거를 하러갔다가 고서방은 엉겹결에 받아든 커피 한 잔을 버릴 수 없어 다 마시고는 영 잠을 못이뤄 토막토막 끊어진 잠이 억울하다는 듯 새벽에 일어나자 마자 마누라한테 잠 못잔 하소연부터 꿀렁꿀렁 게워냈다
나는 고서방보다 하루 전날에 커피 한잔을 역전 카페에서 마시고는 밤새도록 뜬 눈으로 보내며 커피욕을 하였다. 눙깔이 쑤시고 아픈것은 덤이였다.
누구라도 잠이 오지 않아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의 꼬리를 붙잡고 떨치기를 밤새도록 했다면, 아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밤 새운 불면의 고통을 초성에 발설하지 않겠는가 그만큼 불면은 괴로운 것이다
물받이 공사를 해주지 않고 창고 공사를 대충 끝내는 바람에 처마물이 한곳으로 모여 낙숫물이 바닥의 세멘을 파먹기에 못 쓰는 장판지를 낙숫물 낙하지점에 깔아뒀더니 종일 마당에선 또또또또또또르르또또~~ 모르스 부호를 타전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더불어 어제의 불면에 복수라도 하듯 고서방은 코를 골며 낙숫물 소리를 뭉텅 뭉텅 베어내는 소릴 내며 깊은 잠에 들었다.
이리 비 오는 밤은 잠들기가 아깝다
이용악의 시를 검색해서 읽으며 혼자 옛날의 일을 기억한다
육촌오빠와 동생 상옥이랑 초계면에서 쌍책 사양리 고모집을 걸어 가던 날. 비포장 지방도에 쏟아지는 여름방학의 뜨거운 볕과 먼지 타바타박 이는 흙길 가장 자리에 일렬로 따라오던 자갈무더기하며,
길 가 빈집 하나가 쓰러질 듯 팔월의 볕을 견디며 검은 숨을 떨어진 창호문 밖으로 내쉬던 풍경
걸어도 걸어도 베티재 날망은 나오지 않고
나는 늘 아련한 이 풍경을 잊지 못한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걸구칠 것 없는 철 없는 때에 단 하루의 한나절 일이 평생에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 것은 희안한 일이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잠은 쉬이 들지 않을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