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에 환장하는 농사꾼

살청,푸른빛을 얻다

황금횃대 2020. 6. 15. 00:12

살청,푸른빛을 얻다

권현형

푸른 기운을 죽여야 한다는 말이
놀라웠다, 살청
무쇠솥에 찻잎을 덖어서 맛보는 자의
사지가 부드러워지고 혀의 독이 빠지는 순간

들끓는 생각이 묽어지는 그런 때
껍질 안에서 이미 딱딱해져 있거나
아직 몸이 촉촉한 강낭콩의
푸른 빛을 벗기고 앉아 있을 때
모처럼 둥근 고요가 양푼 가득 찾아 오듯이

대청 아래 묶인, 흰 개의 눈을 들여다본다
짐승의 시간을 지나는 것이라면
부칠 수 없었던 내 뜨거운 문장들도 부디 살청이었길

어두워져가는 악양의
무쇠 빛 산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
저녁 해가 손바닥만큼 남은 빛으로
지리산 골짜기의 광활한 비애를 거두고있다,살청이다

시집 '포옹의 방식' 문예중앙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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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포도순 속에 묻혀 알솎기를 한다. 포도 송이는 바글바글 알들을 매달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현란한 가위질,혹은 손가락으로 빽빽한 알들을 훑어 내린다. 푸른 눈알 같은 포도 알들이 방초제 바닥 위에 흥건하다. 예전에도 말했듯이 액체만이 흥건한 느낌을 독점하는건 아니다.

포도순들은 밤낮으로 자란다
하루에 어떨 땐 잎사귀 두 마디만큼 자랄 때도 있다.
곧 盛夏가 올것이라는 기별이기도 하다
눈을 들어도 초록잎
눈을 내려도 초록알
종일 황도의 그림자를 등판에 새기다 보면 해가 저문다.

집에 들어서자 덮어놓고 나간 설거지거리가 나를 쳐다 본다. 수세미를 들어 눌어붙은 냄비 바닥을 닦아 보지만 시원찮다. 새 수세미로 교체한다.
뻐덩뻐덩한 수세미를 길들인다. 저 짙푸른 청록을 부드러운 푸름으로 바꾸고, 내 손바닥에서 나긋나긋 하도록 세재를 묻혀 냄비 바닥에 살청을 한다
스뎅 냄비가 반짝임을 더할 수록 수세미는 태생을 수그리고 새로운 푸름의 속성을 얻는다.

눈 감으면 바람에 일렁이는 포도잎들이 환영처럼 펼쳐진다. 노동은 내 삶의 푸른 독을 어떻게 살청해 줄것인가. 가만히 눈감는 저녁 한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