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까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끝 이름자 하나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 머리칼만 쥐헝클다가 빗소리를 들으며 아침에 조기 구운 후라이팬 바닥을 휴지로 닦아내는데 탁, 생각이 났다, 식, 그래 유영식 선생님이셨지!
지방 여자상업고등학교 교과 3년 내내 서예라는 과목이 있었다. 유영식 샘은 전공은 공업부기였으나, 서예 과목도 한 시간을 맡았다. 희멀건한 순두부를 고추기름 없이 끓여 놓은 듯한 얼굴색을 가지셨다. 수업 시간이 시작되면 샘플 한자 유인물을 한 장씩 돌렸다. 선생님의 침튀김을 받아내던 우리반 1번에서 10번까지의 동무들이 한묶음의 유인물 중 자기거 한 장을 빼고 어깨 뒤로 유인물을 넘겼다.
이런 풍경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칠 때에도 볼 수 있었다. 전달, 전달로 이어지는.
모나미볼펜 뒷꽁지에 십원짜리 알미늄 펜촉을 끼우고 모나미 잉크를 찍어서 한 자, 한 자, 漢字를 공책에 써나갔다
글씨는 음각도 양각도 아니였는데 우리의 필사본은 입체적으로 획들이 얼켰다. 선생님은 작은북을 동동동 두드리는 작은북 채를 가지고 다니면서 우리의 머리를 콩 ' 때리거나 아니면 필필 날리는 성의 없는 글씨체를 북채 대가리로 콕콕 지적을 하면서 칠판 앞으로 걸어가 직접 칠판에다 분필로 한자의 미학을 한껏 살린 정자체를 시연해 쓰시기도 했었다. 이렇게 아스라히 기억에도 지워진 풍경들이 손가락으로 두드리다보니 손가락 끝에서 아득한 기억들이 고물고물 피어난다, 그래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게 수업시간 45분동안 선생님은 느릿느릿 책상과 책상 사이, 그러니까 1분단, 2분단, 3분단, 4분단, 5분단 사이의 작은 오솔길을 작은 북채를 들고 사열 하다가 마침종 소리가 나면 "오늘 수업은 끝"이라며 인사를 받고 교실을 나가셨다.
유영식 선생님은 공업부기 수업도 맡으셨다
1학년때는 상업부기만 배우다가 2학년이 되면 공업부기를 배운다. 상업부기의 알파와 오메가는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인데, 공업부기의 알파와 오메가는 뭐였지? 원가계산? 하여간 이건 생각이 안난다. 공업부기 시간은 매우 공포스럽게 진행이 되었다. "오늘이 며칠이고?"하는 물음이 떨어지면 그 날짜 끝숫자를 가진 학생들은 바짝 긴장을 하였다. 질문이 그 번호들에게 쏟아졌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전생에 아마 합숙 훈련을 하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선의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그런 방법으로 학생들을 일으켜 세울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가끔 관공서 공문이 배달되면 그 흰 백지 위에 쓰여진 글자를 한자로 바꿔 써 볼때가 있다. 사십여년 한자를 전혀 쓰지 않았더니 중고딩 과정에서 배운 한자는 다 까먹고 한 문장에 몇 자 안되는 한자를 결국 바꿔놓지 못하고 연필을 놓고 마는 것이다.
문맥을 눈치 까서 읽을 수는 있으나 뜻과 음을 말하며 달구새끼 계자를 써보라면 눈앞이 깜깜하고 머리 속이 회색벽으로 꽉 차버리는 것이다.
어이쿠, 저녁 빗줄기가 점점 세어지네
고서방은 옥수수 두 자루 사먹었다더니 늦게 올 모양이다. 밖은 이미 어둡고 고서방 외에는 들어 올 식구가 없는 집은 온통 빗소리로 가득찼다. 이럴 땐 그저 내면의 나와 계속 대화를 하자
한문 쓰기를 다시 해볼까?
종이 신문도 한자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세로 편집도 집어 던진지 오래인데 새삼 한자는 말라꼬!
그러나 배움의 추억이 아름다운데 그걸 다시 재현해 보는것도 나쁘지 않을거야. 거기다 요즘은 전화기 속에 어플로 종이책 안 뒤적거려도 가능한 세상이 아닌가
매일 한 장씩, 연필로 글자 쓰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떨 땐 꾸벅꾸벅 졸며 글씨 쓰는 날보고 고서방이 혀를 끌끌 찬다. 고시공부 허냐? ㅎㅎ
쓰다보니 새록새록 붉은뺨에 고운 웃음 지으며 한자 공부를 재미있게 했던 십대의 내가 슬몃 옆구리에 붙어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