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먹고 쓰는 편지

편지 -학이에게

황금횃대 2011. 5. 24. 06:42

 

 

 

그림도 오랜만에 그려보려니 잘 안 됩니다

맨날 가지고 놀던 붓도 농사철에는 어디에 박혀 있는지 찾을 길이 없고, 할 수없이 색연필로.

이즈음 철둑 비얄에는 씬나물꽃이 노랗게 피어 애기똥풀 꽃과 더불어 흠뻑 노랑색을 뿌려 놓습니다.

 

무엇이든 가만히 들여다보면 꽃이든 나무든 사물이든 예쁘고 정겨운 얼굴 뒤로 슬픈 그 무엇이 배경 음악처럼 깔려요. 그래서 나이 들어가며 자시 들여다보는걸 부러 외면해요. 세상의 많은 것들 중에 사람만큼 <자세히>의 뒷배경으로 슬픔을 많이 깔아 둔 것도 드뭅니다.

그래도 한 줄 글에서, 무심히 내미는 손길에서, 웃음 한 자락에서도 사람의 슬픔은 촉수처럼 뻗어 있어 아니 볼 수가 없는 노릇이지요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몇 자 쓰고 있으니 깊이 잠든 고스방의 손은 자꾸만 내 몸에 닿아 꼼지락거려요. 다 내려 놓고 잠을 자면서도 손끝의 촉수는 무엇에 닿기를 원하니...그는 어떤 슬픔에 몸을 담그고 있을까요.

 

5월 끄트머니 촌구석 풍경은 이렇습니다.

곳곳 써래질을 마친 논들은 사나흘 뒤에 어린 모를 품으려고 잔뜩 긴장해 있어요

부드러운 흙들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가득 고인 물에게 최대한의 항심을 요구하며 입도 벙긋하지 않아요. 바람이 혹간 날아와 옅은 파문을 만들고 사라집니다.

길섶에 토끼품과 바랭이, 독새풀이 신바라이 난건 감출 수 없는 사실이고요오~

무장무장 푸르러가는 계절, 숨어 피는 꽃들, 돌개바람이 이는 농사꾼들의 바짓가랭이, 새참 배달하는 국수집 오토바이 RPM...등.

 

                                               2011.5. 23  전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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