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라 보며 집구석에 있자니 딴거는 암것도 못하겠다
못하겠다...하면서 자꾸 자신에게 세뇌를 시키니 정말이지 이젠 대문 밖에 나가는 일도 드물다
종일 어질러 놓은 것 꽁무니 따라댕기면서 주워담고, 몇 십년 가라 앉혀 놓은 먼지들이 아이들
쑤석거릴 때마다 살판이 났다하고 떠들고 일어나니 어쩌다 햇살 한 오리라도 창을 통해 들어오면
그 먼지가 창공에 뿌려진 삐라처럼 반짝반짝 빛을 받아 부유한다.
어제 이어 오늘도 양껏 춥다
벗은 느릅나무 작은 가지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자못 비장하다
고속도로 비얄에는 어젯밤에 한바탕 쏟아져내린 눈들이 녹지 않고 저희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앉아
바람의 얘길 듣고 있다. 어젯밤 여덟시 막차에 누가 왔다지 두런두런..
눈이 시작 될 때 그는 기차에서 내렸다.
머리에 털나고는 처음 밟은 땅.
이곳 지명을 이야기하면, 저어기 강원도 어느 곳에서 난다는 석탄이 땅을 파면 한 바가지씩
나와 줄 것 같은 느낌.
역전 앞 바다식당은 애저녁에 문을 닫았다. 이틀 동안 밤이면 눈발이 휘날리는데 이런 밤을
배경으로 돌아다닐 청춘은 이곳 촌구석에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막차의 손님이 역사를 빠져나가면 언덕 위에 역구내 전등도 하나 둘 소등이 되고 역무원들은
이제 손전등을 흔들며 한번씩 작은 플랫폼 구간에 서서 지나가는 열차를 향해 무사를 비는
시늉이 있겠지.
육교를 건넌다.
철길을 가로질러 건너가며 내려다본 철길에는 눈들이 와우와우 쏟아진다.
기차가 아랫녘으로 내려가면서 거쳐가는 지명은 빤하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아서 기차가 보이지 않으면
마음 속으로 여자는 기차가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졌다고 기억해 둔다.
사라진 기차는 불쑥 왜관에도 나타나고, 또 대구에도 나타나고 더 멀리는 청도와 밀양, 그리고 삼랑진이나 구포..이런 곳에서 불쑥불쑥 나타날거다.
여자는 그와 조금 떨어져서 걷는다.
걸어서 여자의 친구가 한다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아모 대책없이 서울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여기에 내렸단다.
긴긴밤 그 여자는 이야기를 들어 줄 것 같았겠지
사는게 왜이래 허무하고 지럴긋어? 그런 줄 이미 알았지만 살아보면 또 씩잖은 희망이 생기잖아
해 뜨면 돋아나는 희망, 매일 문드러지는 손가락 같은 밤, 나는 할 말이 많단말이야. 뒤늦게 불어 온
이 열정, 나는 글을 쓰고 싶지. 아니아니 문학을 얘기하고 싶은거야.
문학? 거 무슨 개 풀뜯어 먹는 소리우?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당신은 마주 앉았으니 자, 한 잔 받으시게
그러나 여자는 불판에 눌어 붙는 막창 알갱이를 부지런히 뒤집어 놓고, 저 혼자 홀짝 소줏잔을 비우더니
서방이 아직 저녁 먹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며 식당 문을 열고 사라졌다. 닝기리.
낭만으로 도배해 줄 것 같았던 눈도 어느 새 짱짱하게 그치고 밤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쑥한
낯빤데기를 내 놓았다. 어�쇼? 별도 몇 개 달아놓았네.
식당 주인 찬숙이와 그 남자는 몇 마디 이야기를 더 주고 받았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다. 보나마나 소주는
한 병으로 끝나지 않았을테고, 그 여자가 드르륵 식당 미닫이 문을 열며 주인여자에게 외친 <돈 받지말고 나둬. 내가 담날 계산할게>했지만, 그는 잠바 안 주머니 양쪽에 모두다 손을 넣어보고 지폐를 찾아
술 값을 계산했으리라
집으로 돌아온다
아직 남편은 들어오지 않았고, 단숨에 소주 한 잔 마시고 뛰어 왔더니 목덜미에 땀이 배인다.
이렇게 편하지 않는 술은 마시는게 아닌데..
세살 박이 조카딸이 잠을 청한다. 검실검실 감겼다 다시 떠지는 눈, 저 검은 눈
아모라도 우리는 한 때, 저렇게 검고 깊은 눈들을 가졌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