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동맹 상순이

비 왔던 날

황금횃대 2007. 6. 30. 23:13

이틀 전에 쏘내기 한 줄기 했지요?

포도밭에 일하러 아침에 갔는데 정말이지 <육씰허게> 더웠세요

내가 엥간해서는 긴팔 작업복을 안 벗고 땀을 찔찔 흘리면서도 그냥 일하는데

그 날은 도저 안되겠는기라, 그래서 작업복을 활딱 벗어서 포도낭게 걸어 놓고는

난닝구바람으로 일했어요

우리집 포도밭에 와 본 분들은 다 아시것지만, 우리 포도밭이 길에서 좀 낮아 옴팡 꺼져

있세요. 그래서 길 우에로 차타고 슬슬 지나가면 뭐 내가 포도밭에서 뭘 입고 일하는지

자시 안 보이지를. 그래서 그거 믿고 난닝구만 입고 일했는데, 뭐 눈 좋은 양반이 지나가다

봤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촌에서는 난닝구만 입고 일하는게 벨로 흉은 아니니께.

 

그렇게 벗고 일을 하니까 팔띠기가 햇볕에 노출이 되니 대번 벌겋게 좁쌀만한게 올라오는거라

이른바 햇빛 알레르기. 그래도 한번 벗으니 다시 주워 입들 못하겠어요. 속에서 천불이 나는거라

으이고, 내가 갱년기라더니 맞긴 맞는 모양이여. 작년만 해도 이렇들 않았세요

더워도 마스크까지 하고 목에 수건 감고 일해도 지금 처럼 속이 답답허니 천불이 나들 않았는데

올해는 도저히 안 되겠어요

그래 가려운 것도 참고는 포도 알솎기를 해 나가는데 원래 알솎기가 일이 더디요

포도 한 송이 붙잡고는 속에 겹치는 포도알은 다 가위로 파 내야하니까 얼마나 솥깝쯩 나는 일이여

아무리 그래도 일 하는 버릇이 대충 하는 걸로 길들여지지 않았으니 꼼꼼하게 보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요.

내가 살림은 참말로 대충대충 처삼춘 벌초 하드키 그렇게 살지만, 포도 송이 손질하는거랑, 그림

그릴 때하고, 글씨 쓸 때는 좀 까칠하니 꼼꼼해요. 글씨는 날려 쓰는 걸 되도록이면 하지 않아요.

그런다고 누가 표창장 주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그렇게 지지리궁상을 떨어요.

혼자 일 하니 해도해도 이놈으 포도골이 줄어 들덜 않어. 하루 종일 다물고 일하는 입에서 곰패이

스는 냄새가 나게도 생겼지요. 그러나 속으로는 욕 엄청 합니다 씨팔....조팔.

농사라는게 신명나게 일을 해야 별로 힘도 안 들고 하는데, 이렇게 힘에 버겁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자꾸 까꾸장한 맘이 앞서요. 일하다가 포도골에 털썩 주저 앉아 바람이 이나...하고

하늘 한 번 쳐다보면, 야속시리 나뭇잎은 꼼짝도 안하고 고자리에 고대로 매달려 있어. 흐이고

날씨가 사람 쥑이는구마이..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져요, 어데서 세찬 바람이 휘리릭 모자창이 흔들릴 정도로 일어납니다

그럼 포도잎들이 일제히 뒷면의 흰 부분을 드러내면서 한번 뒤넘겨치기를 하는데, 그 땐 꼭

카드섹션하는거 같아요. 바람이 잦아들면 곧바로 초록색 앞면을 내 보이고. 바람 불면 뒷면의 흰색...

몇 번을 그러더니 억센 포도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듣게요. 후둑, 후둑, 후두두두둑...후둑 .

여기저기서 빗방울을 받아내는 포도잎의 힘찬 소리가 듣기재요. 포도잎이 허공에 달려 있으니 북가죽

을 때리는 소리처럼 빗방울 소리가 울려요. 정말 그러냐고요? 그래요. 정말 그렇습니다.

 

오전 내도록 어찌나 더웠던지 아주 이가 갈리던터에 그렇게 빗방울이 등때기 따당, 따당, 떨어지니

순간순간 시원하쥬. 이정도 비 오면 비 맞아 가며 일해도 좋겠다 싶어 비가 제법 떨어지는데도 그냥

일했어요. 그런데 골짜기를 타고 천둥소리가 우르릉우르릉 울리기 시작하더니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눈으로 빗물이 타고 들어가서 일을 더 할 수가 없어 손을 쳐들고 일을 하니 빗물이

팔을 타고 들어가 겨드랑이 쪽이 흥건하고 금새 옷이 다 젖었어요.

비오면 말이여, 옷이 젖을까 노심초사하며 우산 들고 이리저리 피할 때 마음하고, 까짓꺼 한번 흠뻑

젖어보자하고 들이대서 홀딱 젖고 나면 또 마음이 달라져요.

비 한 방울이라도 덜 맞을려고 이리저리 몸을 구겨서 우산 속에 집어 넣을 때야 괜히 마음이 졸여지고

그렇지만 다 젖어서 마른 구석을 찾아 볼 수 없고, 거기다가 신발 속에도 물이 들어가 걸을 때마다 철벙

철벙 물소리가 발바닥에서 울리면 세상에 비가 그렇게 시원하고 마음이 편할 수가 없어요.

괜히 심장이 애인만내러 가는 숫츠자처럼 울렁울렁 거리며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나 혼자 자랑스럽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겁니다. 이거 과대망상인가? ㅎㅎㅎ

비 맞아 주는 이런 일, 그것도 홈빡 젖어 빗물이 몸을 타고 줄줄 흘러내릴 때는 내 몸에 작은 도랑이 하나 생긴것 같아요.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아닌 소낙비가 내리는 날, 나는 하늘에서 시작된 물을 받아 땅에 이르게 하는 또랑이 되지요. 아주 잠간이지만 이런 생각은  훗날 비에 대한 생각을 다르게 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할 수 없이 밭둑가로 나와서 나무 파레트 위에 털석 앉아요

그렇게 앉아서 맞은 편 산의 숲을 보고, 다른 집 포도밭을 보고 있노라면 아! 나도 그들처럼 움직이지 않는 어떤 풍경이 되는고야요.

비 안개는 먼산을 뿌옇게 감싸돌고 비를 뿌리고 맞은 편 산에는 좍좍 빗줄기가 수직으로, 혹은 빗각을 그리며 억수로 떨어집니다. 그러다 숲에 있는 참나무 꼭대기가 상모돌리는 상쇠의 머리처럼 한 번 핑그르르 돌아요. 바람이 시작된 것이라, 미처 상쇠의 머리가 한 바퀴를 다 돌리기 전에 늘 이웃해 살고 있던 크고 작은 나무들이 일제히 몸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바람의 연주가 시작된 것이래요. 바람은 보이지 않는 지휘봉을 들고는 나무들에게 사인을 주기 시작해요. 그러면 나무들은 바람의 손끝에서 방전이라도 되는야 순식간에 화들짝 제 몸을 흔들며 비와 같이 호흡을 맞추기 시작합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솨아아아하고 바람을 타고 빗줄기가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빠르게 혹은 조금 빠르게 제 각각의 빠르기와 흔들림을 연출하며 소리와 모습으로 숲이 일제히 움직이는 모습이.

 

나는 나무파레트 위에 오도마니 앉아서(머리에는 오토바이 하이바를 쓰고 앉아서 안전빵이래요) 비를 철철 맞으며 삼십여분 비와 바람 숲이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봤어요

오~~~ 아침 나절 그 웬수같던 더위는 까맣게 잊고...쏙이 씨원해졌습니다.

가끔 누구한테 말은 모하고 부글부글 속은 끓어 오를 때, 미친 척하고 들판에가 서 비 한번 신나게 맞아보십시요. 그러면 좀 시원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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