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금 전에 택배 보낼 물량 포장작업해서 택배영업소까지 싣고 가서 물표 작성해서 갖다 붙이고 오토바이 타고는 비맞고 집에 왔더니 사는 일에 만정이 뚝 떨어져요. 아침부터 시작된 비가 종일 오네요
가을을 재촉하는 빗방울이라 떨어지는 속도가 사뭇 가을이 밟아대는 패달의 느낌으로 와 닿네요.
포도 작업할 때는 딴생각 하는 일은 금물이래요. 조금이라도 옛날 한가롭던 시절, 그러니까 오줌 누고 털 여가가 있던 시절을 생각하면 금새 맥이 빠져요. 맥이 빠진 사이로 틈이 생기고, 그 틈 사이로 메꿀 수 없는 비애와 연민이 �아오면 큰일나요. 손가락에 힘이 스르륵 빠져 나가기 때문에 오로지 포도 송이에 집중을 합니다. 포도 작업하는 일은 왠만한 외과 의사의 일과 흡사합니다. 포도알이 갈라져서 그걸 후벼팔라믄 손질하는 가위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해요. 잘못하면 다른 포도알을 찔러서 엄한 놈도 따내야 하거등요. 그렇게 두어개 잘라내면 포도송이 모양이 뻐꿈해 져요. 어제 농활 온 만옥님은 이해를 하겠지요. 그러면 상품성이 떨어져서 못 쓰게 되지요. 아깝잖아요. 그래서 포도알을 꼭지째 잘라서 뻐꿈한 곳에 포도알을 박아 넣기도 해요. 사먹는 사람은 좀 기분 나쁠지 몰라요, 그래도 못 먹는 포도 넣는게 아니니까 괘안아요. 그거 드셔도 되요.
2.
지난 토요일에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어 저녁 여덟시에 기차타고 대구 가서 모임하고 다음 날 새벽에 왔어요. 모임 가기 전에 아버님 간병 들다가 집에 왔는 날 저녁이였세요. 이주일을 넘게 병원 보조침대에서 잤으니 온 몸이 구석구석 안 쑤시는데가 없어. 집에 와 방바닥에 등때기를 갖다대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늦게 빨래 돌려 놓고 씻고 방에 들어와 잠이 들었는데, 거실에서 티비보다 잠이 들은 고스방이 한숨 자고는 두시 넘어서 들어왔재 아매. 들어 와서는 그 동안 홀애비 신세로 지낸걸 청산하느라 날 찝적거려요. 한잠 들은 내가 겨우 의식을 되찾아 지금 내가 뭘 해야 하는가..하고 생각을 하니 갑자기 화가 나요. 여편네가 병원에서 그렇게 애를 묵고 와서 정신없이 자고 있으면 좀 불쌍한 맘이 안 드는가? 그걸 꼭 깨워서 저 하고 싶은 것을 해야하냔 말이다.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을 하려니 아파요. 고스방은 애를 쓰는데도 나는 아모 느낌도 없이 그저 잠이나 좀 잤으면 싶은 맘 밖에 없으니 자연 몸이 경직되잖여. 부부관계라는게 서로 즐겁고 부드럽게, 사랑하는 마음이 철철 넘치지는 않더라도 같은 마음이 되야 하는거 아닌가. 그래서 내가 아프기도 하고 해서 인상을 찡그리며 살짝 밀었는데 부부란 또 씰데없이 민감하기도 하지. 그런 내 맘을 고서방이 퍼뜩 눈치를 채고는 삐져버린겨. 팩 돌아 누워서는 부애가 났다는 거친숨을 동지섣달
황소 숨 수듯 팍팍 내쉬고 있네. 내 뭔 죄짓어? 나도 그냥 가만히 누워 자는 척하는데 마른 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게 잠이 퍼뜩 깨어서 와야말이지. 가슴은 쿵쿵 뛰고 자다가 이게 뭔 날벼락이여. 이러다간 잠도 못자고 밤을 꼴딱 새겠다 싶어서 일어나 앉아서는 고스방한테 왜 그러냐고...물으니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그냥 자!>한다. 그렇게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데 내가 잠이 오겠어요?하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니 날보고 대뜸 <사람이 왜 그리 변했느냐>한다. 이런 씨부럴..변하긴 뭐가 변했단 말이여. 그러나 그걸 오밤중에 조목조목 따지며 싸울 수도 없고..그냥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사는게 슬퍼지는겨. 그럼 내만 변하고 자기는 안 변했단 말인가. 사람이 천년만년 고냥고대로 살 수 있단말인가. 그런 아우성을 누르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사람이 변해서 그런기 아니고 몸이 이제 말을 안듣네요. 내 몸이라도 내가 어쩌지 못하게...>하고 힘없이 한 문장 뱉고 나니 눈물이 삐질삐질 나와. 어이구 쑈를 하라 Show를!
그렇게 희안한 밤을 보내고 담날 대구 가야하는데 입이 떨어져야지. 포도는 따다 놓고 작업도 해야하고 하니..포도 작업을 하다가 모임 시간이 가까와지니 동창친구들이 자꾸 전화를 하네. 출발을 하였냐고.
처음 몇이서 전화를 받을 때는 아마 못 갈것 같다고 포기를 하고 대답을 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부애가 나네. 내가 거기 못 갈 이유가 뭣이 있는가..하고. 집으로 들어와서는 전화를 걸어 저녁 여덟시 기차로 모임에 갔다오겠다고 말하니 <갔다 오든동 말든동>하며 얼음이 얼게 썽그렇게 대답이 하네. ㄱ렇게 말하면 오케이사인이지 바로 옷 갈아입고 나간다.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기분이 좋아야 전신만신백구소주가 목구멍으로 술술 잘 넘어가는데 고스방이 똥씹은 듯한 인상을 보고 갔으니 술이 목에 턱턱 걸린다. 요즘 소주는 가시도 같이 넣나?
그렇게 쌩파리X마냥 틀어져 있던 고스방도 포도일을 하자 마음이 풀어졌다. 흥, 안 풀어지면 누가 겁나나. 일은 시켜먹어야하구...ㅎㅎ
3
근데 그 이야기 할라구 여태 주낀기 아니고, 그 날, 그러니까 모임 끝나고 친정 집에 가니까 새벽 한시가 다 됐어요. 띵동~하고 초인종 누르니 이층에서 자고 있던 올케가 문 열어 줘, 울 엄마 아부지 다 깨어서 반색을 하며 반기네 딸래미 왔다고. 병원에서 그동안 애 묵었재..하며 이불도 깔아 주시고..하네. 한 시 넘어서 자서 새벽 다섯시에 일어 났는데 그 세시간 남짓 자는데도 내가 두어번 깼네. 가마히 깼는데도 울 엄마는 내가 추워서 깼나 싶어서 이불을 다독거려 덮어주고 그래..역시 뭐니뭐니해도 울엄마가 젤 좋아. 울 아부지는 새벽에 나가는 딸을 기어이 오토바이 태워서 역까지 데려다 주시네. 택시타고 가면 된다고 해도 신작로까지 걸어가는것도 아까와 대문 앞에서 낼름 다 큰 딸을 태워 동대구역 문 앞에 딱 내려 주시네. 역시 뭐니뭐니해도 울 아부지가 젤 좋아.
그 좋은 울 엄마 아부지 사랑을 받고 왔는데 고스방 눙깔이 까재미눈이 되든말든....내가 다 받아주지 뭐 그까이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