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밤, 안경을 어디 벗어 놓은지 모르겠다. 무엇이든 <내가 너를 여기 두겠다고>다짐을 두듯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잠깐 뒤에라도 어디 두었는지 기억이 통 없다. 태풍 나리가 올라 오고 이 동네 언저리를 지나는 동안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마당을 가로 질러, 그러니까 아래채와 차고 사이 처마에 줄을 치고 포장을 쳤다.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는 포장은 물이 고이면 한바탕 폭포처럼 떨어져 내렸다. 아랫채 둘은 원래 양철 지붕에 슬레이트 지붕이라 비가 곱게 내리면 그 두 가지의 질감 다른 지붕은 비슷한 고랑으로 낙숫물을 졸졸 흘려 보냈다. 그러나 어제는 비가 너무 많이 온 탓도 있지만 지붕에서 떨어진 물은 곧바로 포장 위로 떨어져 모아졌다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포도 농사 십수년 만에 포장을 새로 장만했다. 예전 것은 낡아서 비가 아래로 다 새어 나왔다. 새로 산 포장은 하얀색이다. 포장에 빗방울이 때리면 같아 보이는 그 소리도 높낮이를 가진다. 포도밭 나무 파레트 위에 앉아 산 우에, 들에 쏟아지는 비와는 사뭇 다르다. 포장이 조금 낮은 쪽은 계속해서 물이 흐르는 소리, 포장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그리고 한꺼번에 쏟아내는 물동이를 엎어 버릴 때 나는 폭포수 소리..이렇게 비가 뿌려지는 강약에 따라 악보 없는 연주가 계속 되어진다.
포도를 딸 수 없었기에 남은 작업을 다하고, 알따기해서 포도즙까지 말끔히 해결을 하였다.
시동생이 포도즙 짜는 작업을 하는 동안 늦은 저녁을 먹고 머리카락 염색을 한다. 일요일이라 학교에서 일찍 온 딸이 염색을 해 준다. "머리카락이 짧아서 염색하기가 훨씬 수월해 엄마" "머리 자르길 잘 했지 포도일 하랴 머리 관리하랴, 결국 머리는 일에 밀려 뒷전일테니 맨날 수쎄방태기로 지내기 일쑤지" "엄마는 짧은 머리가 훨씬 나아, 거 푸들같은 파마는 정말 어울리지 않았어" 머리의 뒷부분부터 딸은 이야기를 하며 염색을 한다. 차갑고 무거운 염료가 내 머리카락에 흡착되어 오는 느낌이 목덜미에 느껴진다.
친정 엄마는 새치가 심했다. 젊었을 때부터 엄마는 파마를 했고 염색을 했다. 한번도 미장원에서 염색을 하지 않았다. 매번 염색약을 사다가 직접 하였다. 어디서 찾아내 왔는지 동안은 볼 수 없었던 허름한 윗도리를 걸치고(이미 염색약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벽에 걸어 놓은 거울을 양지바른 담벼락에 세우고 거울을 쳐다보며 염색을 하였다. 염색기가 날아간 색바랜 머리카락 밑으로 하얀 머리카락이 비 온 다음날 부추처럼 올라 왔다. 햇볕에 부추같이 올라온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하면서도 엄마는 늘 염색이 귀찮다고 했다. 몇 번인가 엄마는 내가 뒷머리 부분을 부탁했는데 나는 그걸 한번도 썩 내키게 해 드린 적이 없다. 마지 못해, 그 독한 냄새가 싫어서, 낡은 치솔로 엄마의 머리카락을 헤집는 그 느낌이 말로 다 못하게 싫었다. 머리 검은 나는 엄마의 세월이 내겐 오지 않는 줄 알았다.
비켜가지 않는 그것, 내 머리 우에도 비 온 다음 날 파랗게 올라 오는 부추처럼 하얀 머리카락이 돋았다. 나는 양지 바른 곳에 거울을 세우고 내 엄마처럼 쪼그리고 앉아 염색을 하지 않았지만 뒷부분이 안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너번 혼자 염색을 한다고 낑낑거리다가 재수가 좋으면 딸아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딸은 날 닮지 않아 머리 염색 도와주는 걸 흔쾌히 해 주었고, 또 뒷머리만 대충 흐적거리다 칫솔을 건네주던 나와는 달리 딸아이는 뒷머리는 물론이고 옆과 앞까지 머리카락을 세세히 넘겨가며 염색을 해주었다. "엄마, 나는 미용사 하면 잘 할 것같지 그지?" "그러게 머리도 잘 땋고, 만지는 것도 좋아하니 �찬겠네" "근데 미용사는 좀 그렇다" 좀 그렇다가 가지는 의미를 나는 완전히 해석을 못했지만 그냥 동의를 하고 만다. 앞 이마에 염색약이 묻어서 까맣게 변했다. 머리를 빗어 착착 붙여 놓던 딸과 내가 동시에 웃었다. <이렇게 해 놓으니 앙샘(앙드레) 하고 똑같다 그지..크하하하하
허옇던 머리카락이 까맣게 변했다. 골고루 물이 잘 들여진 내 머리카락은 마치 염색을 끝낸 毛絲같다.
무얼 얘기할려고 했냐하면, 딸이 옆에 있어 참 좋다는 그 이야기 할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