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침개 다 구워놓고 점심을 먹는다는게 세시쯤이였다. 지름냄새 맡으면 닝닝하니 배가 부른것도 아니고 고픈것도 아니고 그냥 견딜만은 한데 밥을 보는 순간 그건 정확한 내 뱃속 상황이 아니였음이 확인할 수 있었다. 고봉밥 한 그릇에 김치 척, 얹어서는 첫 숟갈 퍼 넣기 시작하고 부터 끝 날때까지 입안에 밥이 넘어 가기 전에 또 새숟갈에 반찬과 밥을 채워 놓는 것이다. 옆에서 입맛없어 까꾸장하니 앉아 있던 시엄니께서 얼마나 속으로 부럽고 질투가 났을까. 무슨 여편네 밥 숟가락이 저렇게 크냐고.
질투란 크고 적고, 화려하고 비싸고와 같은 물건에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는 식욕에도 질투가 생기고, 내 좋아하는 사람이 그 딸을 어여삐 여기면, 그 딸에게도 은근히 질투의 화살이 겨놔지는 것. 질투라는 말 대신 우리말로는 <샘>이 있다. 친정 엄마는 젊어서 샘이 많았다. 없는 집구석에 시집와서 샘만 많으면 몸이 고달픈 법. 남 잘 사는 걸 보면 그렇게 샘이 날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남의집 일도 많이 하며 고생을 했다. 이즈음 들녁에 나가면 넘실넘실 슬슬 황금물결이 술렁거린다. 내 논에는 더러 핏대가 올라와 꼴사납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데 옆집 논에는 씰어논 앞마당같이 맨드롬하니 고만고만한 이삭들이 고개를 차악, 늘어뜨리고 노랗게 익어가는 걸보면 그것도 샘이 나지.
차 타고 지나가다가 꿀밤 나무가 있어 그 아래 허리 구부리고 자루에다 꿀밤을 우루구로 수루구로 주워 담는 손길을 보면 그것도 샘나지. 그 자리에 차 세우지는 못하고 조금 달리다가 꿀밤나무를 발견하고 차 세워 나무를 치어다보면 이미 다 떨어갔는가 꿀밤이 하나도 없어. 아까 그 나무가 더 눈에 밟히고 부러운 법.
이제 저녁을 먹고 손위동서, 아래동서들이 설거지를 다 하다. 어머님은 부침개 굽고 저녁 먹기 전, 잠시 모여 이예기하는 우리를 불러 밤을 까 놓으라고 냉장고에 밤을 꺼내 바닥에 휙 널어 놓는다. 알아서 까 놓고 할텐데 왜 저리 노인들은 1/2박자 앞서가려는 것일까. 호두도 어디 있으니 까 놓으라고 얘길하신다. 알았어요 어머니 다 까놓을때니 걱정마세요.
아침 설거지를 하고 생선을 손질하는데 어머님이 왔다갔다하면서 가까이 사는 동서가 일찍 오지 않는다고 욕을 한다. 귀에 거슬려서
"어머님 안 듣는데 그러지 마시고 전화해서 일찍 오라고 하세요. 당사자도 없는데 욕을 하면 뭐해요!"
"내가 말라꼬 전화를 해, 꺼대 오던지 말던지.."
"당사자가 들을 말을 왜 제가 듣게 만들어요 듣기 싫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늦게 오든 일찍 오든 음식 다해서 낼 아침에 차례 지낼 수 있게만 하면 되지."
나도 곱게 말이 나갈리가 없다. 지척에 사는 동서도 열두시가 넘어서 꺼대 왔으니.
아무 말씀 안 하시는게 내 부아를 덜 돋우는 일이다.
갈 수록 나는 호랭이가 되어가고 있다. 이 일을 우짤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