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노름방에서 맞던 설날

황금횃대 2005. 2. 8. 01:09
노름방에서 맞던 설날

옛날에 울아부지가 그랬어요

설날 신새벽, 요강에 오줌눌라고 부시시 일어나면 아부지 자리가 비었어요

필경 그믐밤, 눈썹이 쉰다는 전설을 굳게 믿고 아부지는 노름방에서

날밤을 새신게 분명해요

그래도 조상님들 차례는 지내야했기에 아부지는 차례상에 과일을 올릴즘이면

<부스스>도 아니고 푸시시한 얼굴로 겸연쩍게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지요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런 말들이 없어도 차례상에는 반짝반짝 활기가 돌고

고봉 묏밥에 모락모락 김나는 탕국이 올랐지요

고물고물 자슥들을 옆으로 날라르미 세워서 잔을 쳤던 울아부지

그 때 아부진 무슨 맘이셨을까

 

나는 어제부터 음식준비를 했어요. 장이야 훨 그 전에 다 봐다 놨구요

단술을 하고 수정과를 달이고, 곶감을 손질하고 비싼 잣을 살까말까 망설이고

오늘은 콩나물이며 숙주나물까지 다 사왔어요

원촌리에 사는 친구랑 오랜만에 만나서 2000원어치 떡볶기를 사먹으며

잠깐 사는 이야기를 나눴구요. 커다란 모카빵을 하나 사서 그녀가 사 온 몇가지

품목 위에 얹어 주었네요

 

옛날 울 아부지와는 달리, 남편 고스방은 날밤을 새고 오는 일도 없고, 일 하느라

힘들었지 미안하다 고맙다 이런 말은 안 해도 실그머니 잘 밤에 팔 내밀어 베개나

착실히 만들어 주고 답답하다고 돌아 누으면 허..이여편네가 이렇게 잡아 땡길 때가

존거여..하며 다시 몸을 돌려 놓습니다.

 

저눔의 여편네는 입만 뻥긋하면 스방자랑이여 하고 지청구 하실 분 많지요. 그래도

이렇게 명절 앞두고는 좀 푼수 떨어도 괘안아요

 

혼자서 명절을 지내든, 식구들만 오롯 지내든, 돛대기 시장맹이로 떠들썩하게 밥인동

탕국인동 어느 입으로 코로 들어가는지 몰르게 명절을 지내든, "한 살 더 먹어 참 좋았다,

어이구 내가 그 때 한 살 더 안 먹었더라면 어떡했을까"라고 말할 수 있도록 알찬 명절

보내십시요

 

마음 같어서는 냉장고에 수북히 만들어 놓은 닭고기 고명 듬뿍 얹어서 뜨끈한 떡국

한 그릇씩 가슴에 엥기고 싶은데...그럴 날 있겠지요

 

 

편한 명절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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