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 속에서 길을 잃다.
동네 앞산이라고 얕잡아 볼일이
아녀. 매일 운동삼아 산엘 가는데 그날은 혼자 갔쥬
응달에는 눈이 그대로고 양달에는 눈이 다 녹아서 낙엽갈비들이 보송보송하데요
산만데이로 계속 길이 나있길래 살살 따라가봤쥬. 오르락내리락 들은 이야기로는
그 길로 넘어가면 영천사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기에. 그라고 눈 위에 커다란
사람 발자욱도 다문다문 놓여있었시요
최 정상으로 보이는 꼭대기 넓적한 바위에 기대서 멀리
있는 애인한테 전화도했지유
와하하하하..여기는 정상..어쩌구 저쩌구하면서 산에 오니 차암 좋네 다정시리 말도
건냇쥬. 길을 따라
가는데 어쩐일인지 옆으로 내려 가는 길이 나오지 않는거라요
산길은 점점 눈이 녹지 않는 험악지경이고, 간신히 나뭇가지 붙들고 내려오고
올라가고
하다 봉께로 산꼭대기 길로 몇개의 산을 넘었는지 몰라요. 시간을 봉께로 두시간이
지났네요. 겁이 덜컥 났어요. 어느샌가
사람 발자국은 끊어지고 토깽이 발자욱 노루발자욱
같은 짐승발자욱만 눈 위에 나란히나란히 났는거라요
어이구 이일을 어쩌면
좋아..그래도 뭐 숲이 우거지니 않았으니 저리로요리로 가면 되겠다 싶었는데 산들이 물처럼 흘러요. 가도가도 끝이 없이 연결이 되어있었시요.
이름하여 백화산자락.
죙일 이렇게 산 속에서 헤매면 어떡하나 싶어서 겁이 덜컥 나데요. 배 고픈 멧돼지라도 나타나면
나는 그야말로
혼비백산 죽은 목숨이쥬? 그너무 멧돼지는 사람 뼈도 안 남기고 다 묵는다잖여
핸드폰을 꺼내 안테나가 뜨는 방향으로 정신없이 눈길을
헤쳐갔어요. 여기서 미끌어져 바위에 머리박고 콱 죽어도 어떤놈이 알긋어. 내년 봄에 고사리나 나야 사람들이 산에 올라올 판인데
정신이
번쩍 드는게 머리카락이 쭈볏서요. 아이고 죽으만 안된다. 우짜든동 살아서 이 산을 나가야한다. 길 가다가 먼 산보면 왜 나뭇잎이 하나도 없으니
산이 훤하잖여? 근데 산 속에 들어가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꽉 막혔어라. 그 벗은 나뭇가지들이 서로 겹쳐져서 앞이 안 보이는겨
산만 보이고 나무만 보이고 사람이 톳재비한테 홀기면 이렇게 정신 없을라나. 그래도 핸드폰만
무슨 구원의 썩은 동앗줄이라도 되는양
땀 나도록 쥐고 댕깁니다.
길은 아무리 찾아도 없고. 꼭 사람의 흔적 같아서 가보면 거기도 그렇고 저기도 그렇고.
안되겠다
싶어서 경사 불문하고 직각으로 바로 내려가기로 마음 먹고는 죽은 나뭇가지 하나 꺼꺼어서 지팽이를 맹글었지요. 다행히 아침나절에 가서 해는 훤하니
어둡기 전까지는 내려가야겠다 싶어서 마음을 단디 묵었지라. 젖은 낙엽이 얼마나 많이 쌓였던지 발을 딛이니 푹푹 빠져요.
가시나무고 뭐고
손에 잡히는 대로 붙잡고 산을 내려가요. 미끌어지고 가시에 찔리고.
눈에 푹푹 빠져서 신고간 운동화는 철벅철벅 장마비 속을 걷는 소리를
쿨럭쿨럭 쏟아냅니다.
옛날에 들은 말이 생각났어요. 산에서 길을 잃으면 계곡을 찾아보고 그리로 내려오라고
한참을 내려오니
작은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듣겨요. 다행히 얼지 않아서 또 헤맬까바
물인동 뭔동 빠져가면서 내려오니 펀펀한 눈밭이 나와요
아이고
이것이 뭣이냐하고 그 밭으로 올라서니 지난 가을 들깨 추수해 가고 밑둥 남은 가지가
빼배 말라서 눈 위로 고개를 내밀고 나란히나란히
있어요. 아! 사람 손길의 흔적.
순간 눈물이 퍽 쏟아지데요. 바짓가랭이는 뭐래나...옛날 이런 모습을 하고 새벽에 산에서
내려오면 바로 신고들어가십시요 하는 그런 몰골, 신발에 산흙이 묻어서 가짢치도 않어요. 그래도 그넘의 밭고랑보고, 밭고랑 건너가니 사람댕기는
쪼브당한 농로가 나와요. 겨울이라 아무도 안 댕기니 새가 쪼로롱 건너간 새발자욱만 몇개 눈길 위에 찍혀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 반갑고 고마와서
아껴서 길을 걷네요. 길 가에 버려진 베지밀 빈 봉다리, 딩구는 농약병, 종이컵...사람이 쓰다 버린 것들도 그리 반가울 수가 없어요. 눈물을
쓰윽 닦고는 시동생한테 전화를 했어요
삼촌...나 지금 산에가서 길을 잃어가지고 간신히 빠져나왔는데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서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어요. 여기 길가에 간판이 있는데 이리로 와요
반은 울음섞인 소리로 전화를 하니 울 시동생 뭔 일이 있나 싶어서
득달같이 달려왔시요
따뜻한 차 안에서 경위를 설명하니 츠암내..합니다.
나보다 나이가 세살이나 많으니 울 시동생 아직도 날
보고 형수님 소리 하기가 영 어려워 얼버무리고 마는데 징징 울면서 내가 길 잃어 헤맸다고 하니까 웃어요.
어이고 저 철없는 형수를
어쩔까...하는 마음이였겠지유
집에 델고 오는 길...차를 타고 오면서 산골짜기 설명도 해주고 애시당초 내가 내려오려고 찾았던
길은 저쪽으로 와야 한다고 손 끝으로 자시 설명도 해줍니다.
이씨...난 이제 모르는 산 길은 절대 안 갈거라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날 보고 다시 웃더니 내려주고 갑니다.
이런 상황에 고스방한테 전화 못하고 시동생한테 전화하는 나
고스방한테 전화하면 또 못난이소리에다 쪼뱅이 소릴 들을기 뻔하고 잔소리 바가지 덮어써야하니까..ㅎㅎㅎ
산길이야 이렇게 한번쯤 잃고 헤매도 되는데, 마흔 넘은 여편네 살어야 할 길은 이제 헤매면 안 될것인데..우째 좀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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