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묵고 오랜 만에 티비보면서 낄낄 거리는데 전화가 왔다.
처음 핸드폰이란걸 장만 했을 땐 조선 천지 구석구석에서 전화가 어찌나 걸려 오던지 귀때기가 뜨끈뜨끈하도록 전화를 받았는데
이제 그것도 한 십년 썼다구, 신기함도 뭣도 사라진 탓에 일요일이면 전화벨 울리는 소리가 가물에 송이 올라 오드키 한다.
전화를 받으니 대연이다. 나의 영원한 칼치패션 대연이.
정식이랑 술 한 잔 한다고. 술 한 잔 마시다보니 상순이 니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단다. 그래 잘했다.
내가 대구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비 오는 일요일 저녁을 어찌 맨정신으로 보냈겠느냐 느그떨 만나서 한 잔 기울였지.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석 잔이 되면 나는 쪼매 알딸딸해지지, 술을 많이는 안 먹지만 술에 대해 쪼매 알기는 알지.
소주는 첫 잔이 달면 끝까지 오가는 잔이 달고, 배가 부르면 술은 맛이 좀 덜하고, 소주 석 잔이 들어가서 얼굴이 뜨거워지면 그건 내 몸에 맞는 도수지. 요즘 소주는 물 타서 파는가 댓잔을 마셔도 맹숭맹숭햐. 석 잔쯤 마시면 마주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동그스름해져.
각이 진 얼굴, 미간에 주름진 얼굴, 맨날 인상 쓰던 인간들이 부드럽게 보이기 시작하는거야. 그럼 나도 가슴까지 올려 채운 가드를 풀어,
그건 내가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말이지.
저번 모임 갔을 때 정식이가 안 와서 정모 후기 쓸 마음도 없더만, 정식이와 통화도 했지를. 여기 저기 일하는 현장이 멀어서 모임에 오지 못했다고. 알어 알어 정식아.. 내가 차가 있었다면 가는 길에 널 픽업해서 갔을 것인데 못난 촌여편네는 면허도 없고 자동차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나라고 맨날 이렇게 어두운 세상만 있겠느냐 나도 보란 듯이 면허 따서 운전을 하며 열어 놓은 창문으로 흰 장갑 낀 손을 내놓고 나부낄 날이 있겠지. 어째, 손이 나부낀다니까 이상하다 그지? 그럼...머플러쯤으로 해 두자.
살다보믄 속 답답은 날들이 있지. 아무리 서방놈이 옆에서 아부를 하고 함 달라고 아양을 떨어싸도 사람이라면 언제나 제 가슴패기 깊숙한 곳에 짱박아 둔 고독이 있기 마련이지. 내색을 잘 안 해서 그렇지 누구나 다 있어. 여사때야 그걸 잘 다독여 눌러 놓지만 고연히 그것들이 치밀어 올라 올 때가 있어, 딱히 갖고 싶은 것도, 죽고 싶도록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이 나이에도 무답시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올 때가 있어. 그 때 마시는 술 한 잔은 보약이야. 사람이 말야 지가 지 인생 살면서도 뭐가 뭔지 모를 때가 있잖아. 바쁘기는 육실허게 바쁜데 내가 말라꼬 이렇게 바쁜가...하고 잠깐 생각할 때가 있지. 시간이야 광속으로 잘도 흘러 가는데 발 딲고 요대기 우에 누워 가슴에 나란히 손을 겹쳐놓고 천장을 빠히 쳐다보면 나는 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뭐땀시 사는가. 내가 잘 살고는 있능강? 못 살고 있다면 어떻게 못 살고 있는공? 하면서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시간말야.
그 때도 벌떡 일어나 뒤안 모티이 돌아가서 포도주 병 하나 따서 붉은 그 액체를 혈관에 흘려 보내는 거야. 안주가 뭔 대수야. 하늘에 별을 한 번 치다 보는 것으로 끝이지. 별은 밝기가 지랄이고, 달은 싯누렇게 훤한 인상이 대낄이지.
그래 대연아, 고맙다. 임태도 일 하고 술 한잔 하면서 고단하면 내한테 전화 좀 하지. 전에는 한 번씩 전화 하디만 요샌 통 전화가 없네. 임태 눈을 보면 공연히 슬퍼. 왜 그런지 몰라. 임태는 그게 매력이야 ㅎㅎ 남자가 그런 눈을 가졌다는건 백만불짜리 재산이야. 임태야 이 글을 읽는다면 그 이쁜 눈을 잘 간직햐. 정모 후기 쓸려고 한번 글쓰기 페이지로 들어와 긁적거리기도 했는데 이젠 그것도 시들햐. 다~아 나이 묵었다는 증거지. 나이를 먹는다는건 열정이 식는 일이야. 육신이 쇠락해 가는거 그건 아무것도 아녀. 요즘 돈 있으면 츠자처럼 팽팽한 피부를 바로 맹글어주잖아. 열정이 식는 것도 조금 쓸쓸한 일이지? 그럼, 그 때도 술 한 잔 하는 거야. 이 때 마시는 술은 비아그라보다 더 혈행의 흐름을 팽팽하게 당겨주지. 석 잔 째 잔을 집어덴지고 나면 눈이 조금 풀리잖에. 부드러워지는 물상(物像) 우에 지난 날의 치열함이 오버랩되지. 그래, 그 땐 이랬었지, 맞어 맞어 용기백배의 청춘, 무대뽀의 시절, 구신도 무섭지 않던 담대함, 사물이 시시각각 내게 말을 걸어오던...
에이,
대연아, 잔 받아라. 정식이 니도 퍼뜩 잔 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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