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조께 잡사 뵈겨."
"머이여. 이게?"
말 중간에 공배네가 옆에서 막 깎은 무를 먹기 좋게 도막 내어 공배 앞으로 밀어 놓는다. 대가리가 파릇하고 속이 시리게 흰 무다.
어석.
소리가 나게 한 입 베어 문 공배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것 한 번 먹어 보라고 손짓을 한다.
"아이고, 시언하다. 매옴허니. 속이 다 내리가네 기양, 끄어억, 무시 맛은 그저 동지 섣달 엄동 설한에 눈은 쌯이는디 밤은 짚우고, 모다 둘러앉어서 이얘기허고 놀다가잉, 얼음뎅이맹이로 찬 요런 놈을 속 덜덜 떨어감서 먹어야 지 맛이여. 요런 때 먹는 요런 무시는 나주 배허고 안 바꾸제잉."
어석.
공배는 물 많고 단단한 무를 맛나게 다시 한 입 벤다.
"아재가 머 언제 나주 배를 잡사 보기나 허곗소 .?암만허먼 달고 연헌 배가 맛나지 매운 무시가 맛나까? 배 고픈디 빈 속에 먹으먼 속이나 할키고.
혼불 4권 186p
결산이다 송년이다, 망년회다 갖다 붙이는 이름이 달라서 그렇지 모두들 한해의 마지막을 그저 보내기 아수워 이렇게 밥 한끼에 술 한 잔이라도 서운찮게 한 자리에서 먹어보자고 모임들이 연일 이어진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밥이라도 같이 먹어야재..하면서 선뜻 꼬집어 내밀수 없는 날들을 헤아리며 막연한 약속이라도 한 마디 흘리고 있다.
농사일 손 놓은지 며칠 되었다고 속이 갑갑하다. 옛날 같으면 사랑방에 앉아 새끼줄을 꼬고, 구신이야기 몇 두름 엮어 내다가 처마 밑에 달린 곶감을 훔쳐먹고, 시큼한 탁배기라도 어데서 한 주전자 생기면 말라 비틀어진 북어대가리도 마다 않고 뜯어 씹으며 바닷가 짭조름한 바람에 얼었다 녹고 녹으며 꾸덕꾸덕 말라 드디어 북어가 된 명태의 고된 일생을 가늠해 보기라도 하지만 이즈음 촌구석에는 사랑방 사라진지 오래다. 다들 티비 앞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한 번도 제 눙깔로 확인 해보지 못한 휘황한 연말 시상식을 멀건 눈으로 치어다보고 있다.
늦가을,
무를 뽑아다 놓고 무우청은 무 대가리부분을 살짝 곁들여 차곡차곡 잘라 놓구선 시레기를 엮는다. 추려 말려 놓은 짚을 한오큼 집어다가 밑둥치를 단단히 틀어 묶어서는 반으로 딱 갈라 놓구선 시레기를 엮는다. 옛날 새끼꼬아 먹고 사는 집에 아버지와 아들이 새끼를 꽈 장에 팔러가면 아부지것은 잘 팔리는데 아들것은 여엉 인기가 없었다. 아들은 아무리 집에와서 공들여 새끼를 꽈도 아버지를 따라 갈 수가 없었는데 그 아버지가 죽는 날 아들이 아비에게 물었다.
"아버님, 왜 아버지의 새끼는 잘 팔리는데 제것은 뒤로 맨날 처집니까?"하고 물으니 아비가 숨 넘어가기 전에 딱 한 마디 하더란다. "터럭을 매꼬롬히 잘라라"
새끼를 꼬면 처음 시작했던 짚이 길이가 짧아져 새 짚을 덧대어 꽈 나가는데 그 때 원 새끼줄 밖으로 덧댓 짚뿌리가 조금씩 튀어나오게 마련이다. 그걸 말끔히 정리하라고 아버지는 일생의 노하우를 아들에게 전수하고 저 세상으로 경계를 넘어갔다.
시레기를 엮다보면 새끼줄 꼴 때와 똑 같은 일이 생긴다. 짚을 덧대어서 시레기를 계속 한 두릅이 되게 엮어 나가야하는데 초보들은 그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애써 시린 손 호호 불어가며 한 두릅 엮었다싶어 마지막에 고를 지어 아픈 무릎 펴고 일어나 시레기를 번쩍 들면 어디선가 어설피 덧대진 짚이 대책없이 툭, 빠져버리는통에 시레기도 힘없이 짚과 함께 땅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한번은 우째우째 다시 시레기와 짚을 골라내서 엮어보는데 단디 엮는다고 어금니까지 옹실물고 했건만 창고 서까래까지 들고가 못에 거는데 후두둑 소리와 함께 아까와 같이 시레기와 짚이 툭, 떨어지면 거참, 아무리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라도 터진 입으로 한 소리 안 나올 수가 없다. "에이 씨발 이기 와 또 떨어지노"
죽어가는 에비가 남긴 유언까지가서 매꼬롬하게 다듬을 실력까지 시래기단을 묶을려면 석 삼년은 손가락 호호 불어가며 연습을 해야한다. 시어머님은 해 넘어가면 이제 여든 아홉이시다. 팔씨름을 하든, 걸음걸이를 보든, 내가 엄니보다 힘이 훨씬 더 세지만 시래기단 묶어 놓은 것을 보면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
어머님이 묶어 놓으신것은 터럭 두어개 떼내면 가지고 놀고 싶게 매시라운 시래기단이 되고 나는 아직도 중간이나 칠부능성 어디쯤 위태롭게 빠져 달아나려는 시래기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시래기단을 보게된다. 사람이 힘만 좋다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책 읽다가 무 이야기가 나와 삼천포로 살짝 새 버린 이야기를 썼지만, 이즈음 촌구석 사랑방에 앉아 잇뿌리가 떠르르하게 차가운 무 한 입 으썩, 베어물면 그 시원한 맛이 저 글맛에 비기겠는가.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