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몸으로 시내버스에 몸을 올려 꾸벅꾸벅 오다가
석양이 산우에 걸린 모습을 아양교 다리에서 보는 저녁이면
두어코스 남은 길이라도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리 난간의 때를 손으로 닦으며
걸었습니다.
그 때는 피곤도 노을 앞에 녹일 줄 알았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감자떡'시를 써준 총각을 만났습니다
늘 청록색 잠바를 입고 다니는 얼굴이 하얀 총각이였지요
무얼 사면 얼마나 꼼꼼히 보는지 남자가 왜저래 꼼꼼하나..
속으로 몹시 쪼잔하게 생각했지요
그 때는 그가 속마음까지 꼼꼼하고 다정한지 몰랐습니다
삼중당 문고에서 나온,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책이 있었습니다
출근할 때 싸구려 가방에서 삼중당 문고를 꺼내 버스에서 읽는 것은 누추한 생에 큰 기쁨이였지요
도스도옙스키를 알고, 톨스토이를 만나고, 장 크리스토프를 만나던 새벽 출근길
흔들리는 버스에서 글씨에 촛점을 맞추고 러시아의 풍경을 상상하던 시간들..
그 때는 눈이 나빠지는 줄도 모르고 책 읽으며 좋았더랬습니다
월급을 타면 고기 한 칼 끊어서 식구들과 먹던 기쁨, 명절이면 동생 옷가지를 사들고 집으로 가던 발걸음, 등산화만 보면 곧 바로 산으로 들어 갈 수 있었던 튼튼한 다리, 등나무 꽃 아래 쪼그리고 앉아서 나누었던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들..
그 때는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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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아주 훗날 내가 늙으면
그 때는 앉아서 이렇게 쓰겠지요
자식 낳아 키우고, 시집살이 하고, 농사 지으며, 쑤신 뼈마디 돌보지 않고 매달려 허덕이던 때가 좋았노라고..
그 때는 그랬습니다.
그 때의 그 맹세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