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눙깔에 붉은기가 돌도록 눈을 부릅뜨고 자정을 지켜냈더니 드뎌 새해가 내게 도착했다.
이눔 저눔 도저 분간이 안되는 아이돌들이 티비에서 귀가 따갑도록 소릴 질러대고, 그 옆에서는 조금 낡은 놈들이 추임새를 넣어가며 땡괌을 지르고 있다. 아모 뜻도 없는 노래, 귓구멍에 도착하지도 않는 멜로디이니 가슴팍 근처엔 얼씬도 못하는 소음들만 넘쳐 난다.
고서방은 늦게 잠들어 아침 일찍 일어나지도 못한 여편네를 배려해 혼자 국에 밥 말아 먹구선 일을 나갔다.
이러면 안 되는데...첫 날 일 나가는 남편의 밥상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자괴감이 허벅지를 찌르르 훑고 지나갔지만 어제의 습관은 오늘 쉽사리 고쳐 지지 않는 것. 에구.....인생 참.
어제 저녁 상민이도 업무를 마치고 안양에서 집으로 왔다. 삼일 연휴를 혼자서 지내려니 좀 겁이 났나 보다. 대구에 있는 사촌 언니가 낳은 제 생애 첫 조카를 보러 가겠다고 내려 왔다. 백화점에 가니 애기 옷들이 얼마나 이쁜지....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맘에 들고...그러다 인형 옷 같은 내의 두 벌을 사서 챙겨 왔다. 이제 마악 한 달을 지난 큰집 조카는 떨망똘망 눈알을 반짝이며 입을 뾰조록히 내밀고 있는 사진을 우리에게 투하하면서 무한 귀욤을 받고 있다. 그 동안 시집 안 간다는 소릴 입에 달고 사는 상민이가 그 애기를 보고 오면 마음이 좀 변할끄나? ㅎㅎ
나는 이제 쉰 넷이 되었다. 상민이는 이제 내가 스물 일곱이라고요오오오~ 하면서 공포에 질린 외마디를 길게 뽑아 대었고, 병조는 누나의 스물 일곱보다 내가 스물 여섯이란게 더 무서워..하며 너스레를 떤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고스방, 다들 됏어! 난 이제 환갑이라구! 하며 절망적인 슬픔을 실어서 한 마디하고는 방으로 자러 들어가더만. 고스방, 너무 슬퍼 마오. 아직은 쉰 아홉이지 않소. ㅎㅎㅎ
이렇게 원하든 원하지 않던 착실히 나이를 먹어 온 우리는 꿈도 없는 밤을 지나고 병신년 첫 날을 맞이 했다. 어제의 밥상과 다를 바 없는 김치에 밥에 국에....설거지에 청소에 이불 개기....등등의 자잘 구레한 미션을 수행해 내며 한 해를 살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여전히 뉴스엔 꼴도보기 싫은 사람이 나와서 국민을 윽박지르고, 일의 터전을 잃어 버린 농성장에선 한 장도 누그러지지 않는 칼바람이 불어대고 있다. 나는 가능하면 용을 써서라도 체온을 상승시켜 따뜻해진 열을 나누고 살아야지, 정이란거 그까잇꺼 헤프게 나누고 살어야지...하며 괜히 어금니를 꽉 깨물며 다짐을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첫 날 다짐이란게 올해는 기어이 누굴 만나고, 어딜 가보고, 무얼 먹어 보고, 저걸 가져야지...같은 것이였으나 이제 쉰 넷이나 되는 나이를 먹었으니 좀 달라지는 구석이 있어야 하잖에. 내 안의 에너지를 퍼 올리려면 무엇보다 뽐뿌질을 부지런히 해야하니...자, 팔뚝 근육이나 착실히 만들어 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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