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1992. 11. 16

황금횃대 2005. 6. 6. 18:03

1.

 

수녀님, 드디어 수녀님 차례입니다

무서리 내리던 어젯밤, 나는 그 동안 쓰지 못한 편지를 한꺼번에 몽땅 쓰려고 봉투에다 미리 여섯사람의 주소를 모두 써놓았지요

준비운동으로 오후에 농도 초과한 커피도 뒷축으로 눌러 밟은 양으로 한 잔 털어 넣었시요. 커피 먹으니 위가 좋다고 찌르르 트위스트를 춥니다. 그것도 딱, 한번만.

저번에 수녀님과 현주 그년이 왠일로 온다해서 몹시 가슴이 설레였는데 아! 무산 되었어요. 수녀님, '무산'의 한자어를 아시는가요. '안개가 흩어짐' 아니 '안개의 흩어짐' 혹은, '안개, 흩어지다' 쯤의 제목으로 홀로 설수 있는.  그게 뭐야요... 설움이지요.

 

 

2.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으려고 나는 자주 어금니를 꽉, 깨뭅니다. 맘씨 좋아 보이는 남편은 그 꼼꼼함을 지나치게 드러내어 나의 허술함을 파고 듭니다. '파고 듭니다'라는 시어가 있는 시를 기억하시는지요. 나는 잠시 편지 쓰는 걸 멈추고 한용운 선생님의 시집을 찾으러 옆 방으로 갑니다. 불행히도 시는 '파고듭니다'가 아니고 '휩싸고 돕니다'네요. 그래서 나의 무지도 용서 받을 양으로 나는 몇 편의 시를 더 읽어 봅니다.

 

 

꽃이 먼저 알아

 

 

옛집을 떠나서 다른 시골에 봄을 만났읍니다

꿈은 이따금 봄바람을 따라서 아득한 옛터에 이릅니다

지팡이는 푸르고 푸른 풀빛에 묻혀서 그림자와 서로 따릅니다

길가에서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고서 행여 근심을 잊을까하고 앉았읍니다

꽃송이에는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아니한가 하였더니, 아아 나의 눈물이 떨어진줄이야 꽃이 먼저 알았읍니다.

 

라고 읽고 있는데 남편이 귀가했지요. 뭐하고 있느냐는 눈초리로 눈이 묻습네다. "시집 읽어요"남편은 내가 황동규의 시집을 읽고 있으면 뜨아한 표정이 됩니다.

'누구거야" 남편은 이제 입으로 묻네요

"한용운 선생님 시집이야요. 한용운 선생님 알아요?"

"만해 선생님을 왜 몰라" 남편이 대답합니다. 나도 모르는 그를 남편은 자알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을 존경합니다.

 

시는 사람을 무릎 꿇게 하고, 그 자세로 한 통의 편지를 쓰게 합니다요 수녀님, 그거 참 좋은거지요.

 

 

3.

 

오늘은 92년도 마지막 제삿날이요

어젯밤에 준비 다 해놓고 12시 되어 잤더니 오늘 비교적 일찍 끝났어요. 시월의 마지막날 쓸려구 작정한 서신이 오늘에야 그 형체가 마무리되니 기분이 홀가분하네요.

 

4.

 

옥상엔 곶감이 발그무레 말라갑니다. 색깔이 참 예쁜 것은 물론이거니와 맛 또한 뿅,뿅,뿅,가는 기똥찬 맛이지요

나는 겁도 없이 네개나 먹었으니 내일 똥눌 일이 걱정이요.

편지 처음 부분보다 훨씬 기분이 밝아졌지요. 수녀님,

시와 편지는 바로 이런 힘이 있어요 그지요?

 

 

5.

 

요즘 주말연속극 '아들과 딸'을 열심히 봐요

두 여주인공이 생각하는 것, 그리고 편지 쓰는 것 등등이 우리 둘과 많이 닮아서 나는 위장이 근질근질해요

본의 아니게 세 장씩이나 편지를 쓰게 되었으니 수녀님 공적시간을 많이 빼앗았겠지만 수녀님의 속독실력은 이 세 장의 편지를 눈깜짝할 새, 혹은 단숨에 읽을 것이 분명하니 나는 그런 걱정은 아예 덮겠습니다.

 

6.

 

수녀님, 우리들의 회색노트를 기억하시는지요

그 때의 열정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리고 그 때의 기쁨들을.

 

 

 

1992. 11. 16 상순이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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