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실꾸리>
달력 맹글어 보낸다고 그림을 그릴려니 마땅히 소재도 없고 해서 책상 위를 휘 둘러 보는데
실꾸리가 눈에 보이는거라요
요새사람치고는 내가 바늘을 자주 잡아요
뭐 특달리 작품 맹글라고 그라는기 아니고, 울 아덜놈 발가락이 희안한가 양말에 구멍이 자꾸나요. 그래서 엄지발가락 부분에 빵구난 걸 꼬맬라고 바늘을 자주 들어요
녀석이 좀 까탈시럽긴해도 양말 기운 것은 잘 신고 다닙니다. 근데 목 늘어난건 안 신고 다니더만요.
굴러다니는 실꾸리를 가만히 보니까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모양으로 실이 감겨져 있는데, 그 무늬가 상당히 오묘하고 이뻐요. 몇 년전에 토목하는 남모 동창놈이 제도용지에다가 직선을 연결했는데 조금씩 각도를 달리해서 이은 선들이 모여서 중앙에 원을 만들어 내더만요. 그걸 편지로 보낸 적이 있는데 오늘 실꾸리를 보니까 그 그림이 생각이 나요.
아침에 실꾸리 하나 그려서 달력 맹글어 보내고, 실꾸리 그림이 생각보다 이뻐요(나만 그렇겠지만.)그래서 저녁에 또 하나 더 그렸습니다
뭐 내 그림의 실 감긴 모양은 실제 실꾸리보다 훨 거리가 먼 모양이지만 이미지만은 이렇다는거죠.
<저녁 실꾸리>
저녁 실꾸리는 양말을 꼬매고 남은 실이 바늘에 달려 있습니다. 달려 있는기 아니고 꿰여 있다고 해야 하나요.
옛날 상고 졸업하고 첨 들어간 작은 주물 공장에 한사장님이라고 연세 많으신 분이 계셨어요. 그 할아버지 사장님은 참 알뜰하고 검소하신데 아들 딸은 그렇지 못해서 늘 전전긍긍 하셨더랬습니다. 그 분이 무슨 이야기 끝에 <아직(아침) 문고리 다르고 지녁(저녁) 문고리 다르다꼬...>하시면서 맹 같아 보이는 것도 때에 따라서는 다르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오늘 실꾸리를 그려보니 그 말씀을 이해하겠어요. 참말로 이십년도 더 넘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네요.
실꾸리는 맹 그대로 그 모양으로 감겼는데 아침에 그릴 때와 저녁에 그릴 때가 틀리잖아요?
그 아침과 저녁 사이에 나는 세상의 비관과 세상의 기쁨을 모두 맛보고 살았을겝니다.
요즘 시험기간이라 아이들은 늦게 집에 오네요
있을 땐 큰소리내며 잔소리하고 간식 만들어 달라는 소리에 귀찮다고 찡그리고 그랬는데
한 며칠 이렇게 저녁 시간이 조용하니까 좀 그래요
언젠가는 어머님 아버님도 안 계실테고, 아이들도 내 옆을 떠날테고...그러면 집구석은 절간처럼 고요할텐데..아! 그 땐 어떻게 살아갈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