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시누형님의 행복지수

황금횃대 2004. 4. 12. 19:05
어제하고 오늘은 영동읍 못미처 주곡리에 사는 큰시누네 포도 따러 갔었지요. 형님네 포도는 들판에 있어서 산골짝에 있는 우리집 포도보다 한 열흘 먼저 익지요. 그래서 형님네가 먼저 포도를 따기 시작하는데 올해는 우라질 빗놈이 왜그리 퍼붓는지 포도 익을 때 비오면 절딴납니다 그려

포도가 익으면서 수분을 많이 섭취(?)하는데 그 때 오는 비 공짜라고 마구 빨아 먹다가는 포도가 다 터져버려요. 그걸 열과현상이라합니다.
여튼 엊저녁까지 멀쩡하던 포도가 아침나절에 가보면 면도날로 촥,촥 쳐 놓은 것처럼 갈라져 있어요. 새까만 눈탱이에 맑간 포도물이 보이면서 껍데기가 촥 갈라져 있으면 대가리에 열올라요. 뚜껑열립니다.

그것이 상품성이 있던 없던 따서 콘티박스에 담습니다. 못난 자슥도 자슥이듯이, 그렇게 갈라진 포도도 선뜻 땅바닥에 패대기 못 치고 바구니에 담아 옵니다.
요새는 미친년 오줌깔리듯 비가 그렇게 찔끔찔금 쏟아부어지니 밭에서는 언감생심 작업할 생각도 못하고 집으로 다 싣고 와요

포도 담는 상자와 손질하면 떨어지는 포도알 담는 양푼이 하나 꿰차고 손질하는 가위 손에 쥐고 바닥에 앉으면 그 자리가 오늘 말뚝 박은 내자리가 됩니다.
포도 콘티 박스 옆에서 포도 송이를 집어 봉지를 열어 포도를 꺼내서, 말을 타고 풍경을 보듯 쓰윽 하고 포도송이의 전체 상태를 살피고는 재빨리 가위를 들이대고는 터진 포도 속에서 갈라진 포도를 꼭지째 똑 잘라내지요. 삶이 그렇듯 이것도 역시 숙달된 손길을 좋아합니다. 초보들은 가위들고 어리대다가 멀쩡한 포도알의 볼때기를 찔러 놓기 십상입니다.
외과의사의 손놀림이 이렇지 않을까 짐작을 해 봅니다.

포도알이 꽉 박혀 있는데 저 구중궁궐처럼 느껴지는 아득한 속심지 부근에 갈라져 수분을 반짝반짝 내 놓으며 입을 벌리고 있는 포도알이 보이지요. 가위의 주둥이를 살그머니 포도 알 사이로 집어 넣습니다. 아주 은밀히...가위 주둥이가 들어가는 걸 다른 포도알이 눈치채지 못하게.

포도알을 찔러 버리면, 세상에나 포도알 하나가 머금고 있는 과즙의 양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포도 한 송이 전체몸을 샤워시키고도 남을 지경입니다. 정확하게 꼭지를 잘라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달려있는 위치가 교묘하여 예리한 가위의 날렵한 주둥이를 피하는 꼭지가 있으면 할 수없이 포도알에 깊숙히 가위를 찔러넣어 포도알 전체를 파 내게 되는데, 그 때 잘못하면 포도는 그냥 홈빡 젖고 맙니다. 아..점잖은 이 아낙의 입에서 매끄럽게 욕한마디 튀어나옵니다. 에이씨 터져짜나

손은 그렇게 목표점을 향해 가위를 들이대고 있지만, 육신의 입이야 수다떨기 바쁘지요. 손위 시누이지만 시누남편 김서방과 올케 남편 고스방은 승질머리가 빼다박은 듯 비슷해요
그래서 일년동안 서로의 바깥이 안사람에게 잘못한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기 바뻐요.

아이들 이야기며 사는 이야기 어머님 아버님 이야기 형제간 이야기...목 마르면 왕따시만한 포도알 하나 따먹고.

그 중에서도 옛날 사는 이야기가 젤 재미있지요
형님은 스물넷에 죽자사자 따라붙은 김서방을 따라 구식 혼례를 올렸는데 그 예식사진이 아직도 우리집에 있어요
초례청에 신랑각시가 혼례복을 입고 서 있는, 낮으막한 초가집 앞에는 정겨운 이웃들의 무던한 얼굴들이 병풍 뒤에 또 한겹의 병풍으로 쳐져있고,
신랑의 입은 좋아서 아주 찌져져 귀 뒤에 걸렸네요.

그 새색시가 층층시하 시집살이에 중간에 아들 하나 없이 내리 딸 여섯을 낳았으니 그 견딤의 세월이란 필설로 못하지요 해마다 그 시절 이야기를 듣지만 들을 수록 재미있어요. 아니할 말로 한 둘쯤 죽었으면 싶었을 때도 있었는데, 병원이뭐야 예방접종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다 살았다구. 츠암내 감기도 한 번 안하고 자라더라고.

딸 여섯을 낳아도 시어머니가 기저귀를 큰 딸한테만 만들어주어서 딸 다섯은 기저귀도 없이 난닝구 쪼가리 빠꼼한데 째가지고 기저귀 만들어 썼지. 먹을 것도 변변히 못먹고 그래도 저렇게 이쁘게 자라서 시집가 엄마한테 잘 하지. 아들많은거 보다 딸 많은게 엄마한테는 훨 좋지. 지금도 포도 딸 때되면 딸내들은 하루이틀이 멀다하고 전화를 하고,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 ...전화기가 불이 나.

아들놈은 그런저런 정은 없어. 그냥 든든한 울타리다 싶은거 그거 뿐이지. 딸들이 훨씬 나아.

동네사람들 테레비 없을 때 우리집에 테레비 사서 울타리 너머러 테레비 보러 오라고 소리지르고.. 없어도 그 때가 훨씬 정겨웠지. 정이 훨씬 넘쳤어. 밭에 일하고 와서 열두식구 먹을 국수 밀어서 가마솥에 보릿짚 때서 땀 철철 흘리며 끌이가지고 퍼내기에 퍼서 마루에 갖다 놓으면 그런 큰 역사가 없는데도 그걸 예사롭게 했으니. 그 때는 욕심도 없고 사심도 없고, 몸뚱아리도 안 아프니 좋았는데 이젠 아퍼서 꿈쩍거리기도 힘들고.

하루는 시누가 놀러 오면서 소고기를 한 근 사가지고 왔는데 그걸 물을 한 솥 잡아서 무에 파 넣고 풋고추 다져넣어 국을 끓였는데 그게 얼마나 맛있던지 지금도 가끔 그 맛이 생각나서 소고기 많이 넣고 끓여보면 그맛이 안나. 입맛을 돋굴데로 돋궈놨으니 소고기국이 맛이 있을리가 있나

살림 한가지 장만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아이들 예방접종 해야한다고 연락이 와서 영동장까지 걸어 갔는데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 딸래미 하나 들춰 업고 하나는 걸려서 영동까지 타박타박 걸어가면 세상에 나 혼자 바깥 나들이 하는거 같고.. 넘들이 장에 간다하면 나는 언제한번 영동장에 가보나..했는데 이젠 가기도 싫어. 그 때 생각하믄 장날마다 꽁치 한대가리라도 사러가야 할낀데......
참 궁색하고 살어도 그 땐 좋은 것은 확실하게 좋았고, 기쁜 것도 참 기뻣고..근데 요새는 김치냉장고를 사도 그저 덤덤하니..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것도 그렇고...



포도 상자는 마루 귀퉁이에 차곡차곡 쌓여 올라가고, 이야기의 줄거리는 옛날로 갔다가 며칠 전으로 왔다가, 왔다리갔다리 벽에 걸린 괘종시계의 부랄처럼 왔다가 갔다가..


저녁 때가 되서 저녁하러 집으로 옵니다.
버스 기다리는데 빗방울이 떨어지니 아픈 다리를 이끌고 형님이 우산을 가지고 헐레벌떡 뛰어 왔어요

우산 안 써도 되는데......

형님 어서 들어가세요. 고만 하던일 놔두고 저녁 드시고 하세요 갈게요

내일 또 만나서 포도작업을 할테지만...흐르는 세월이 참 덧없다 하는 예순두살 울 형님.






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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