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이 자꾸 따뜻해진다.
걸어가면 등때기도 따뜻하다
고추장 담과야지
일전 붉은 고추만 골라서 고치장꺼리를 곱게 빻아놓았다
고추가 너무 말라도 고추가루가 억세여
곱게 빻아 놓은 고추가루를 햇살에 잠시 널어 두면 마치 붉은 염료같다
촌 살림에서도 태양초 구하기가 힘들어 벌크에서 속성으로 말린 고추를 가지고 고치장꺼리를 장만하는데, 아무래도 색이 검다.
차일피일 미루던 고치장 담는 일을 오늘은 기어이 해 치우려는 듯 어머님이 팔을 걷어 부친다
아침밥도 제대로 먹기 전부터 시작하니 나는 밥상을 차리다 공연히 부아가 치민다
내 스스로 고치장 조제법을 모르면서도 뒷수발하며 하루 해 보낼 걸 생각하니 어깨가 갑자기 매가리없이 힘이 짜안 들어간다.
메주 쑤고는 덮어 놓은 가마솥을 닦는다. 쇠쑤세미로 박박 문지르니 녹물이 나온다. 혼자 힘으로 들었다 놨다 하니 팔뚝이 아니 굵어질 수가 없다.
쌀 서너되 되어서는 물을 끓여 밥을 짓는다
가마솥 밥은 반드시 끓는 물에 앉혀야한다. 물을 좀 많이 잡았어도 후르륵 끓어 넘칠 때 물 조정을 하면 희안하니 밥이 맛있게 된다.
뜸이 들 동안 엿질금을 물에 담근다. 단술할 때처럼 찌꺼기를 짤아내지 않아도 된다. 그져 질금이 불을 정도로 잘박하니 물에 담궈 놓았다가 밥에 뜸이 다 지면 거기다 엿질금을 부어서 삭힌다.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 봐도 밥 알은 쉬이 삭지 않고, 점심때를 훌쩍 넘긴다.
"어머님, 점심 한 술 먹고 하지요"
"퍼뜩 삭을 줄 알았디 얼릉 안 삭네, 엿질금이 적은가?"
해 마다 하는 일이지만 해마다 요량이 아리송하다.
"지깟게 엿질금 물 들어갔으니 삭고야 말테죠 점심 드세요"
"그랄까"
고부간에 앉아서 점심을 먹는다. 헉헉거리며 일차 일을 끝낸 팔십노인 어머님의 호흡이 숨가쁘다.
"천천히 잡수세요 어머니"
"하이고, 갈 수록 힘에 부치네"
"이렇게 담으니 힘들지요, 다른 집에는 그냥 물엿에 고춧가루 버무리고 만다고 하더만"
"에이, 그라만 맛이 없어, 음식 해서 맛 없으면 뭔 뜻이 있깐."
안절부절 몇번이고 도라무깡 아궁지 발길이다.
밑불로 대어 놓은 왕겨는 시름없이 시남시남 타 들어간다
불꽃은 일지 않지만, 왕겨가 타 들어가면서 연기를 피워 올리니, 그 연기의 온도로 엿질금이 밥 알을 삭혀낸다.
소두방뚜껑을 몇 번씩이나 열어본다.
"다 삭었나?"
"아직 밥 알이 망울망울한기 있는데요"
"그럼 더 놨도라"
연기는 혹간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몸부림을 한 번씩 칠 뿐이다.
장꽝은 반들반들 오후의 햇살을 반사시키고, 촉 틔울 기색을 여직 보이지 않는 감나무, 가죽나무, 골담초나무를 휘익 둘러보다.
담장 아래, 담쟁이 넝쿨이 시작되는 구석진 곳에 난초가 푸른 잎을 몇장 밀어 올린다. 꽃잎은 점층법으로 핀다더만, 저 난초잎은 무슨 법으로 피어나나 대번에 몇 장의 잎들을 쑤욱 내 밀어 놓고본다.
시내에는 제재소 사장님이 돌아가셨다더만, 동네 까마귀도 그리로 다 몰려갔능가 당최 꼴을 보기 힘들다.
곧 돌아가신다는 이발집 할무이는 고만 예전상태로 돌아와 예측이 빗나간 동네까마구들이 도랑 건너 상가집으로 다 몰려가 부끄러운 낯짝을 내밀고 있나보다.
그러고 있는 사이 밥이 다 삭았다.
몰캉거리던 밥심이 엿질금의 뭉긋한 사랑에 고만 다 녹아나고 없다. 껍데기만 보얗게 물고 있을 뿐이다
베자루에 그것들을 퍼 담는다. 뽀얀 물이 자루 사이를 빠져나온다. 젖같이 뽀스리하니 농도도 갓 짜낸 엄마젖같다. 한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고 자루를 벌겅벌겅 치대서 밥물이 다 나오도록 매매 짤아야한다. 그래야 한 솥 질금물을 잡을 수가 있다.
젖물이 떨어지는 바가지 밑을 훔치어 슬쩍 맛을 본다 달큰하다.
집구석에 돌아 댕기는 장작이나 나무쪼가리는 오늘이 제 장사날이다.
그저 눈에 띄는대로 주워와 쳐댄다.
지난 날 낡은 집에 기둥으로 쓰였던 오래된 나무도 어설픈 톱질에 뚝뚝 제 몸통을 꺾어 기꺼이 장작으로 변신하다. 녹슬은 톱도 톱은 톱이라
한 쪽 발을 나무위에 올려 밟아 누르고 두 손으로 연신 톱질을 해댄다
하얗게 떨어지는 톱밥, 뼛가루 같다.
아궁지 앞에 앉아 하염없이 불을 댄다
활활 나무는 타 올라 솥을 데우고 젖물같은 질금물을 달여댄다.
설설 끓는다. 솥 가장자리로부터 끓기 시작하여 견딜수 없는 불기운으로 솥은 안쪽을 볶아 쌌는다. 솥 안 전체가 마치 파도와같이 출렁인다. 참을 수 없는 끓어 오름. 바가지를 가지고 끓는 물을 퍼 위에서 떨어트린다
잠깐의 솥 밖 외출로 식은 물이 끓는 물을 잠재운다.
젖빛이 붉은 빛이 나도록 달여댄다.
반 솥정도로 달여졌을 때 누런 엿을 쏟아 넣고 불을 대놓는다.
아침에 불려놓은 찹쌀을 갈아와 단자를 만든다
하얀 가루에 끓는 물로 익반죽을 만들어 도넛처럼 링을 만든다
익반죽 한뭉테기 떼어네 두 손으로 비비면 길다랗게 늘어나는데, 우째보면 고스방 거시기를 좀 닮은것 같기도 하다.
얼른 사위스런 생각을 쫒느라 마주 붙이면 동그란 도넛모양이 된다.
찹쌀 두어되 링을 만들어 놓고는 엿을 넣은 물이 팔팔 끓으면 그 찹쌀단자를 넣어 매매 삶는다.
누런 엿물 사이에 단자가 보름달처럼 둥둥 떠오른다.
이것도 한참을 센불로 삶아야한다.
연기와 김이 하루종일 뒤안 살구나무 아래 차일을 친다.
단자를 조리로 건져서 큰 다라이에 넣고는 나무주걱으로 다 풀어놓는다
엿물을 조금씩 부으면서 다 풀어 놓는다.
망울망울 덜 풀린 것은 한 맺힌 찹쌀이다. 그걸 풀라고 용 쓰다보면 손목에 무리가 가니까 그건 건져서 찰떡처럼 먹는다.
찹쌀이 다 풀어지고, 달인 엿물도 다 부어서 한 다라이 장만해서 식힌다.
한소끔, 두소끔 뜨거운 기운이 빠져나가면 고춧가루와 메주가루를 섞어서 엿물에 후. 린. 다.
후.리.기.
이거 할라고 아침 일곱시 반부터 저녁 일곱시까지 꼬박 12시간 여를 뒤안에서 서성이다.
어려운 과정 다 끝났으니 후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고추가루 후리기도 보통 일이 아니다. 엿물은 걸쭉하고 찹쌀이 들어갔으니 차지지, 나무주걱으로 젓다보면 손목에 경련이 다 일어난다.
그러나...뭐 이제 고춧가루는 다 먹은거나 마찬가지.
하룻 밤 자고 나면 소금 두됫박 퍼와 간을 맞추는데, 한번에 간 맞추려면 큰 오산이다. 조금씩 하루 종일 간을 봐야 제대로 간을 볼 수 있다.
그렇게 간을 보고 깨끗한 오짓동게 담아서 장꽝에 내어 놓으면 이제 고추장은 다 먹은거나 다름없다
그저 날 좋은날 뚜껑을 열어 듬뿍 햇살을 먹게하고, 바람이 통하여 곰팡이 슬지 않게 간수를 하고, 꼬치장이 잘 익었을 때 퍼먹고 다독여 놓는 일까지 고추장 농사의 처음과 끝이다.
'나 죽거등 니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혹여 꼬치장 담가 먹을 거라면 오늘 하는거 그치 하면 실패는 안 할끼다"
"에고..이렇게 힘들면 어디 해 먹겠어요, 어머님 안 계시면 맹글어 농거 사다 묵지여"
그러나 이런 시집살이 재산이 어데 가것는가. 훗날 가마이 생각하믄 손목에 경련나게 힘들었던 기억보다, 따스한 어느 봄날 어무이하고 내하고 하루종일 동당걸음치며 바가지 들고 매운 연기 마셔가며 아름답게 움직이던 그 풍경이 더 기억에 남을걸. 헉헉 내쉬던 밭은 숨결보다, 젖같이 뽀얗게 빠져나오던 질금물의 기억이 더 머리 속을 온통 출렁이게 할걸.
이제 가끔씩, 보리밥해서 고추장 넣고 비벼 먹었다는 둥, 금방 삶은 국수로 비빔국수 맛나게 먹었다는 이야기나 슬슬 올릴걸 약속하며..
상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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