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사라져 가는 것들

황금횃대 2004. 4. 27. 00:44
몇 년전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라는 제목으로 소설이 나와서 뭇 아줌마들의 심정에 아릿한 아픔을 전해 준 적이 있다
다리란 이쪽 저쪽을 연결해서 소통이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로 처녀 총각이 결혼을 할래도 예전에는 다리에 해당하는 중매쟁이가 있어서 서먹하고 은근히 품고 있는 상대에 대한 적의와 의심을 입심좋게 풀어 놓아 검은 머리 파 뿌리 되도록 지지고 볶고 살 수 있는 첫 고리를 보기 좋게 꿰어 놓는다.
이렇게 중매도 사람과 사람사이에 흐르는 강물같은 감정의 강가에 다리를 놓는 일이다.

다리를 주제로 하는 노래도 많고, 영화도 만들고 하는 걸 보면, 다리란 사람의 마음에 누구나가 품고 있는 공통의 아름다운 정서가 있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

내 사는 황간에도 오래된 다리가 있다
이름하여 <금상교>
황간 시내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초강천 위에 낡고 곰팡이 이끼가 핀 모습으로 여위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시아버님 올해 여든 둘이신데, 아버님이 물 건너 초등학교 다니실 때도 그 다리를 건너 다니셨으니, 오래된 다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황간에서 삼대 바람모퉁이가 있으니, 거기에 가면 달려있던 귀도 금새 얼어서 바람에 떨어진다는 전설아닌 전설이 있어, 그 중 한 곳이 바로 금상교 다리를 지날 때다.
초강천, 그 툭 터진 공간에서 사정없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광풍에 가까운 겨울 바람이 주인공
한 겨울 눈보라가 칠 때 거기를 지나 가려면 다리 건너기 전에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온 몸을 삼태기 하나에 다 담을 듯이 옹송그려서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이빨을 앙 깨물고 지나가야 한다.

여름철 비바람이 드셀 때는 시덥잖은 오천원짜리 얄팍한 우산은 금새 시클라멘 꽃잎처럼 그 자락을 홀랑 뒤집어 버리고, 멋진 머리모양으로 잔치집 갈라고 건널라 치면, 느닷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틀어 올린 머리 모양이 금방 따귀머리 모양으로 바껴 버리기 일쑤이다.

그렇게 바람이 불 때는 사정없이 망가트려 놓지만, 금상교에도 아름다운 풍경은 있다.

금상교 다릿발은 그저그런 시멘트 기둥이나, 여름이 되면 다리 아래는 종일 다리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깨끗하고 차가운 물이 끊임없이 흘러 황간 아이들의 물놀이 장소가 될 뿐 아니라, 시시한 수영장의 오염된 물이 아니니,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다가도 피래미 새끼를 잡고, 발바닥으로 다슬기를 댓마리 잡아 내기도 한다.
돌멩이를 동그랗게 성처럼 쌓아 어린 아이들도 퐁당 담궈 놓으면 하루종일 지치지 않고 물 속에서 놀 수 있으니, 특별한 시설이 없는 이 곳에 아이나 어른이나 들어가서 오리처럼 하루 종일 떠 다닐 수가 있다.

해질녘 다리를 건너면서 낡고 패인 다리 난간에 서서 월류봉을 쳐다보면, 세상 어디에서 그런 이쁜 노을을 구경할 수 있을까
저녁이 검은 자락을 드리우는 산빛에 반하여 주황과 붉은색을 절묘하게 섞어서 월류봉 구비구비 달이 흐를 길에 미리 주단을 깔아 놓는 석양. 바쁜 걸음 중에서도 그 풍경을 보면 숨이 헉! 막히여 고만 일은 잊어버리고 아이처럼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다.

가을이 되면 황금 들판이 하나의 대형 액자에 넣어진듯 반듯하니 보이는 곳도 바로 금상교 위에서나 볼 수 있다.
한 없이 눈까풀을 내려 놓고 최소한의 실눈으로 가을 바람 한 줄기를 잡아 보는 곳, 봄이면 가볍게 촐싹이며 내려가는 물결이 경쾌하고, 겨울이면 스스로 무게를 실어 시름없이 깊어가는 물빛을 내어 놓는 초강천,그 위에 크지도 작지도 않게 앉아 있는 금상교

다리 위로는 늘 역전 앞 사람들과 다리 건너 사람들의 삶들이 부산하게 오고 가고, 그들이 나누는 입소문과 발빠른 행동들이 교차를 하며 누구라도 편하게 "어디 가셔요?" 인사할 수 있는 곳

그 금상교가 헐린다.
지난 여름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다리 난간이 떨어져 나가고, 긴 세월의 발걸음에도 낯빛하나 변하지 않았던 다리가, 고만 모든 걸 잃고 스산한 몇개월을 보내더니 드디어 헐리게 되었다
강 폭이 유독 다리 부분만 좁아 물이 넘치게 되었다는 이유로 더 넓은 다리가 들어설 모양이다.
안 그래도 내 시집올 때와는 그 모양이 판이하게 변해버린 제방뚝.
홍수시설 보완으로 모두 옹벽을 쌓아서 제방을 만들었지만, 예전처럼 물길이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만든 선들이 없어졌다.

초강천변은 이제 둘러보면 인공으로 만든 돌벽과 사이를 메꾸어 놓은 회색의 시멘트 빛깔 뿐. 억세와 잡풀이 사라진 초강은 이제 삭막하기 그지없다. 쨍쨍 내리쬐는 땡볕 그 따갑고 더운 눈길을 어데 둘지 몰라 힘겨워하다가도, 강 가의 풀숲이나 물풀에 눈길을 던져, 푸른 기운 눈꼬리에 달아 시원해하던 작은 즐거움도 없어지게 되었다. 거기다 정이든 금상교도 눈 앞에 사라졌으니.

몇 달 후면 번듯하고 생경한 새 다리가 지어지리라.
그러나, 오며가며 문득 내가 서서 바라보던 풍경 사이로 눈꼬리 사려물고 슬픔에 젖었던 시간들은 이제는 옛 다리에서 있었던 추억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으리라.


사물도 든 자리는 이리 서운하건만, 하물며 사람이랴.




[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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