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살어낸 이야기

황금횃대 2004. 4. 27.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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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을 아들놈 뒤통수에다 대고 머리 깎으러 가라고 소릴 지르고 난 뒤에야 녀석은 실금실금 내 눈치를 보며 이발비 육천원을 청구해서 머리를 깎으러 갔다. 그넘의 머리카락 자르기가 그렇게 귀찮은 일인가 갈 때마다 나하고 실갱이다. 한번도 한번 만에 간 적이 없다. 노래를 불러야 머리를 깎으러 간다. 이럴 거 같으면 우리도 머슴애들이 머리를 기르든말든 냅뒀으면 좋겠다. 구질구질 지저분하고 머리카락의 길이에 따라 정신상태를 판단해 버리는 편견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나는 아들놈이든 딸년이든 학교에서 머리길이를 규정하는게 싫다. 지지던볶던 그냥 냅뒀으면 좋겠구만. 그리고 아이들이란 미적감각이 차라리 어른인 나보다 더 탁월해서 보기 싫으면 저희들이 더 하지 않을거다. 지금의 세대란 보기 싫은 것을 저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올해 중학교 일학년 들어간 아들 용돈은 한달에 공식적으로 만원이다. 학교를 걸어다니니 차비가 필요없고, 녀석이 초등학교 때는 오천원 받다가 중학생 됐다고 만원으로 인상해 달라해서 저희 누나도 그렇게 받고 있으니 암말 않고 만원으로 올려주었다. 그런데 딸아이는 그것도 다 안 받아가는데 녀석은 월말이 되면 용돈달라고 목을 맨다. 나도 어지간하지...월초부터 조른걸 11일이 되어서야 만원한장 빼 주었으니. 그러면서 아껴쓰라고 말한다. 어디서 많이 들은 레파토리다. 고서방이 내게 월급 던져주며 꼬박꼬박 내게 하던 말이다. 그렇게 듣기 싫어하면서도 나는 자슥놈한테 한 소리 해댄다. 츠암내..속으로 저자식 그럴거 아녀. 꼴란 만원 주면서 아껴쓰라니..쯔비.

 

딸년의 속바지는 빵구가 몇군데나 났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꾸맬라해도 어떻게 손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다. 그걸 그냥 입고 다닌 딸년도 어지간히 무던하지만, 그걸 또 알아서 교체해 주지 않는 에미도 어데 신경쓰고 사는지 묻고 싶다 히~~

길 가다가 아이들 속바지 한 장에 오천원이란다. 여름이 오니까 회색으로 두 장 사다 만원이란다. 돈 만원이면 일년 내도록 치마 속에 깔끔하게 입고 다닐 수가 있는데 그걸 제대로 갖춰주지 못했으니 나야말로 머리 박고 한시간은 땀 흘리야한다.

 

 

고스방이 바지를 벗어내며 한 마디 한다.

지퍼가 고장이 나서 앉으면 저절로 석류가 벌어지드키 쩌억 지퍼가 벌어진다고. 하도 열고 닫으니 지퍼 이빨이 많이 닳았다. 당신 고추에 가시가 달렸나 지퍼가 왜 고장이 잘나나? 하고 눈꼬리를 사르르 내려뜨고 이야기한다. 여편네가 못하는 말이 없어.

냉큼 수선집으로 가져가서 고쳐온다. 그 귀한 불알 두쪽 길가다 어데 스스륵 흘렀뿌리면 빈 허깨비 죽데기 붙잡고 내만 울어야 할 일이다. 고치니 앞섶이 톱니처럼 잘 아물려 일부러 꺼내갈래도 어렵겠다 캬캬캬.

 

학원비를 내고, 교재비 내고 하니 지갑은 누가 훔쳐간 듯 텅빈다. 그래도 자슥놈 공부하는데 들어가는 돈이라니...뭔 말을 하겠는가. 여편네의 역사는 가계부에 기록이 된다. 별 시덥잖은 김 한 톳이라니...옥수수 캔에 참치캔 목록을 보면 그날 저녁의 반찬종류를 알 수 있다.

삶은 이렇게 고른 간격으로 칸칸히 쳐진 씨줄과 날줄사이에 나뭇잎같은 무늬가 자갸드 문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흐르는 물처럼 자욱없는 족적을 남기기도 한다.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맨날 이마빡에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이빨을 옹실 깨물을 필요는 없다. 저녁 나절 다소곳 책상 머리에 앉아 자그마한 편린이나 모티브를 정리하면서, 그것들 사이에 붙어 있는 생의 살점들을 기록해가다 보면, 생의 전반을 흐르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글을 쓰는 일도 그런 것임에.

휘황한 문체와 유려한 단어의 나열이 아니래도, 혼자만의 조용한 웃음으로 저를 표현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리.

 

오늘은 우체국 아저씨가 소포를 전해준다. 도장을 찍고 풀어보니 카페의 구름 언니가 보낸 책이다. 문학세계 5월호에 수필로 등단한 은미 언니의 글이 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앞으로 언니의 문운이 한층 푸르러가는 나뭇잎처럼 청청하였으면 하는 바람도 써 보면서.

 

 

 

 

전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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