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가 빨쭘 얼굴을 내밀라 하는데 이 무슨 서글픈 작당인가. 아침에 눈이 풀풀 나린다
아주 소리도 없이, 바람의 기척도 느끼지 않고, 어느 공기 알갱이에 부딪히면 잠시 몸을 흔들었다가 무심한 눈길인 척, 세상사 우찌되던 나는 상관없다는 척, 그렇게 찬찬히 눈이 나린다.
아침 설거지 끝내놓고, 발끝에 물 걸레 물고 와서는 발바닥으로 대충 방바닥 세수나 시키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바라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창 가에 앉았다면, 어느 고적한 집 안의 아름다운 창을 연상하겠지만, 촌구석 낡은 집의 창가래야 어제 내린 비로 먼지 얼룩이 적나라하고,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이란 것이 벼락 맞아 윗둥치가 부러진 백년 족히 넘은 느티나무, 이 느티나무는 늙은만큼 감성도 무뎌서 봄이 어디쯤 왔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느티나무 아랫 둥치에 자리 잡은 닭장의 푸른 비닐 지붕이 철 지난 유원지의 파라솔 처럼 생뚱맞게 앉아 있다.
눈들은, 잡아 뜯은 귀신 머리카락같은 어지러운 느티나무가지 사이를 솜씨 좋게 피하며 자꾸 나리고 있다.
며칠 전, 장을 담그다가 장꽝에서 발견한 작은 장물단지.
볼록한 배통에 비해 장물이 나오는 주전자 모양의 주둥이는 메기콧구멍같이 작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밑 면적과 배통의 둘레, 그리고 윗 아구리의 면적이 너무나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그런 이쁜 오짓그릇을 발견했다.
시집 와, 십수년 살면서 전에도 보았을 터인데 어찌 이번에만 이것이 내 눈에 띄여 내 마음을 움직였으며, 그것을 닦아서 집 안으로 들여 놀 생각을 했을까.
천지에 사물은 널릴 대로 널려 있고, 내 눈은 잠 잘 때를 제외하고는 늘 반짝반짝 사물을 향해 열려 있다. 하지만 열려 있다고, 눈동자가 또록또록 소리를 내며 굴러다니고 있다고 만물을 다 깊이 있게 보는 것은 아니다.
늘상 듣고는 있지만, 제대로 안 되는 것 그것은 <마음으로 본다>는 것일게다. 뭐 세상천지의 이치를 다 마음으로 보면 얼매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리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고 보면, 내 주위의 가까운 것들이라도 좀 건성으로 보지 않고 마음에 두고 보는 버릇을 들여야겠다.
장물단지를 씻어 부엌 씽크대 위의 작은 쪽창 턱에 얹어 놓는다. 내가 좋아하는 꽃집 아줌마집에 이른 발걸음을 하여 노란 프리지어라도 한 묶음 사다 꽂아 두어야지.
덤으로, 꺾어 놓은 매화가쟁이 하나 더 끼워 주면 사양치 말고 넙죽 받아서는.
<장물단지의 화려한 변신..>운운은 너무 거창하고, 옛날 호랭이 시증조 할머니, 까탈쟁이 할머니, 그리고 쑥떡같이 순하기만 한 시엄니, 그 3대에 걸친 며느리의 손에서 아침,저녁으로 몇 번의 손이 갔을 작고 반들반들한 오짓독의 오래 전 수고에 지금의 며누리인 내가 고맙다고 인사치레나 하는거지.
눈은 여직도 내린다.
무엇이 아쉬워 겨울는 봄에게 계절의 창을 쉽게 열어 주지 못하고 하늘 가득 흰 눈송이를 뿌려대는지...
그러기나 말기나, 뒷담 아래 냉이는 붉은 얼굴 내어 밀고, 실개천 옆 쑥들은 솜털 흰 잎 들을 쑥쑥 내어민다.
상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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