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싶은 날.
해 지면 한번 나가봐야지.
그나저나 같이 마셔줄 멤버가 필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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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까지 써 놓고는 고스방 저녁 먹고 나가기에 차를 타고 주차장 앞에 있는 친구네 감자탕 가게로 갔어요
"찬숙아 내 술 한잔 도고"
전에 찬숙이가 통닭족발집 할 때 거기 가서 소주 한 병 그대로 마시고 술주정을 확실하게 해 줬기 때문에 찬숙이가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래요. 평상시에는 그 집 근처에 발길도 안하거등요. 맨날 집구석에 있으니 거기 갈 일이 있겠어요?
"왜? 뭔 일있나"
찬숙이가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앉으라고 합니다
신랑 생일이 내일인데 아침에 잡채나 해 줄라고 지금 재료 볶고 있다고 잠시 기다리라네요
뜨끈한 구들의 온도를 앉은 궁뎅이 밑에 꾸셔넣은 손바닥으로 느끼면서 앉아 있었세요
잡채 재료를 다 볶고 찬숙이라 뭐래요
"야이, 뭐 해주까? 밥은 먹었나?"
"아니, 내 밥도 안 묵고 왔다 감자탕 한 냄비 해조."
"그랴. 근데 어짠 일이랴?"
"어..갑자기 술이 고파 안 왔나. 어데 딴데가서 먹으면 황간 사람들이 놀랠끼고 니가 이렇게 식당을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어데 술 친구 할 사람 없나.."
"애경이한테 전화 해보래"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세요. 친구들이 감자탕 끓을 때쯤 다들 왔세요
애경이는 잡채를 한 쟁반 싸 가지고 왔네요
감자탕이 버너 위에서 끓고 밥 몇 숟갈 떠 넣으면서 찬숙이 한테 소주 한 병 가져오라 합니다
위궤양 진단 받구선 술을 통 안 먹었세요
오늘 하루 종일 술이 먹고 싶었세요.
해 지기만 기다렸쥬
해가 아슴아슴 질라 할 때는 내가 아주 술꾼이 된양 하늘을 쳐다봤구만요
지구 자전의 법칙이 여호수아 이래로 계속 됐으니 시계가 돌고 해는 집디다.
맑은 소주가 퐁퐁퐁 술잔 위에 떨어지는 소리
하도 그리웠던 소리라 눈물이 찔끔 납니다
한잔 잇빠이(죄송) 따뤄서는 그대로 목구멍에 털어 넣습니다
허이고...술이 달다는 말을 어쩌다 절실하게 느낄 때가 있지만, 오늘 이 순간 만은 정말 술이 달아요. 또 듣기좋은 퐁퐁퐁 소릴 내며 잔을 가득 채워 놓습니다.
옆에 앉은 순희도 술 맛이 좋답니다.
근데 왠일인지 찬숙이는 술맛이 쓰다고 하네요
애인하고 뭔 일이 잘 안 풀리나..하고 농담도 했더랬습니다.
소주의 기운이 팔다리 말초를 향해 질주하는 레이싱카처럼 알콜기운이 달려갑니다.
눈꺼풀이 갑자기 천근의 무게로 내려앉아요. 여기서 눈을 감으면 술에게 지는 거라. 주머니 속을 디비서 물파스라도 있으면 눈꺼풀에 바르고서라도 이걸 이겨야합니다
이렇게 단 술 맛이 쓰다는 찬숙이가 내 잔을 다시 채워줍니다.
이야기 하는 동안 어느 새 나는 한 잔을 또 비웠나 봅니다.
감자탕에 냉이 뿌랭이가 산삼만한 것을 찬숙이가 한오큼 더 집어 와서 넣어 줘요.
"아이구야. 이렇게 뿌랭이 굵은 냉이를 누가캐왔대?"
"우리집 머슴이 안 캐왔나. 어이구 하라는 것은 안하고 이런거 캐오는 건 좋아흐네"
찬숙이네 머슴이 누꼬? 누구긴 누구야 스방님 보고 그러는거쥐...숟가락이 들락거리며 소줏잔이 채워지며 수다로 그릇이 깨져요
그렇게 소주 넉 잔 마시고 다리 뻗고 앉았으니 머리로는 이러면 안되는데 가슴으로는 도저 받아 들여지지 않던 분노들이 슬슬 녹습니다. 아, 술의 효능이 이런것이지요.
나른하니 알딸딸하게 마음이 풀어집니다. 그랴그랴..사람 사는 일이 다아 거기서 거기재. 속에 쌓이는것 없이 맹탕으로 맑갛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간. 서로서로 묵은 것들을 꺼내서 잔 속에 살뜰이 저어 용해를 시키고는 홀짝홀짝 마셔요
분위기는 한참 무르익어 좋은데 시간을 보니 아버님 저녁 드시러 들어올 시간이라 찬바람 속으로 앞섶 화악 열어 제끼고 걸어옵니다.
이래라도 풀고나면 이 못난 여편네는 속이 좀 시원합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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