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깎기가 고장이 났다
이젠 아이들도 중학생이니 그런 것에 의존하지 말고 칼로 깎아 보라고 넌즈시 권해 보다
커터칼을 들고 연필을 깎기는 하는데 가관이다
칼날의 등판에다 손을 갖다대고 칼을 미니 한 자루만 깎고도 손가락에 자국이 생겼다고 보란다
그게 그렇게 하면 안되고..하면서 시범을 보이니 아하! 한다
컴퓨터 스타크의 키보드 누르는 손놀림은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게 하면서
연필 깎는 손놀림은 원시시대와 다름 없다.
옛날 우리 자랄 때, 연필깎기란게 있었을텐데 그걸 돈으로 산다는 건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였다 향나무 연필은 조금 값이 비싸도 칼로 깎을 때 부드럽게 대패밥이 밀려나오는 감촉이 좋았다 붉은 향나무가 약간의 각도로 구부러지며 갤족한 대패밥을 밀어내고, 연필의 각에 따라 들죽날죽한 부채살같은 모양이 생기면서 연필은 검은 심을 드러내고 부드러운 삼각뿔의 모습을 나타낸다
연필심을 뾰족하게 만드는 일도 상당히 고난도 기술이다.
잘못하여 힘을 주면 심이 푹 파여서 기형적인 심이 되었다. 골고루 왼손으로 연필을 돌려가며 심을 갈아내야한다. 이런 것들이 생각보다 세심한 힘의 분배가 필요하고 모양을 잘 내기 위해선 나무 부분을 깎을 때도 칼놀림을 숙련되게 해야하는 것이다.
얼마전,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한 예를 들어 일찌기 우리나라는 손재주의 섬세함을 성공의 요인으로 꼽았을 정도로 우리는 손으로 일일이 하는 것에 일찍 훈련을 받았다. 언젠가 짚.풀 박물관의 수공예품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데, 짚이나 풀로도 비단 못지 않는 아름다운 선을 뽑아내고 조형미를 갖추는 것을 보고는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즈음 우리는 아이들에게 연필깎기라는 기계를 사 주면서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무엇을 하는 일을 박탈하였다. 물론 연필깎기로 깎으면 그 모양이 일률적으로 나오고, 연필심도 극도록 뾰족하게 깎긴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시 보기 좋은 것에 비하여 우리가 선천적으로 획득한 감각은 많이 잃어 버리는 것이다.
어릴 때, 학교에 갈라치면, 아버지가 연필을 가지런히 깎아서 필통 속에 넣어 주셨다. 붉은 향나무 속살을 깨끗하게 드러내며 연필은 맑은 얼굴이 되어 내 동공에 들어왔고, 연필을 깎아 주시면서 자슥들의 책가방을 한 번 더 어루만졌을 옛 가난한 부모들을 떠 올린다. 공부를 하라말아라 할 것없이 부모 자슥간에 그런 깊은 마음이 전해지면 그것으로 교육은 다 이루었다 하여 과언이 아니다.
시험 둘쨋날인 오늘,
나는 아들놈의 필통을 본다.
어제 깎아간 연필들은 심이 부러지거나 닳아서 연필심의 검은 빛이 번진 흐린 얼굴들을 하고 있다.
밥 먹는 사이 옛 생각- 아버지 생각-하면서 연필을 깎자니, 녀석이 와서 자기도 깎아 보겠단다. 그래....니가 깎아 보아라. 그래야 훗날, 네 자식에게 이쁜 모양으로 연필을 깎아 줄 수가 있지. 내 친정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때야 내가 내 자식에게 연필을 깎아서 넣어 줄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니.
장마가 시작이다.
우리가 그리워 하는 것들은 멀고 먼 풍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저렇게 내리 꽂은 빗줄기 속에 한없이 따스하고 푸근한 풍경들이 서캐처럼 조그맣게 숨어 비와 함께 한 없이 내리고 또 내리는 것이다.
마음 속에서.
상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