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편지- 경운동으로

황금횃대 2004. 7. 15. 16:54
울 딸에게 개망초꽃 그리라 했더니, 이렇게 뚱뚱하게 그려 놓았네
황간에 꽃꽂이 참 이쁘게 하는 아줌마가 있어
그 아줌마 하는 말이,

"참 희안한거 있죠, 꽃꽂이 강습해 보면 몸매가 통통한 사람은 수반에 꽃을 꽂아도 넓적하게 꽂고, 날씬한 사람은 그와 달리 빈약하게 꽂아 놓아요"

울 딸, 글씨도 통통하게 쓰고 꽃그림 그리라니 꽃대궁이 불쌍하도록 꽃을 풍성하게 그려놓네.
그 엄마에 그 딸이여.
엄마 닮아서 그런가 나는 딸이 너무 좋아
맨날 주리끼고 산다고 고서방은 핀잔 일색에 딸과 엄마를 싸잡아 미워하지만, 나는 그래도 딸이 좋아.

어제는 둘이 침대에 빈둥빈둥 누워서 이야기하며 히히닥 거리는데 눈 앞에 딸 손이 왔다갔다 하길래, 손을 붙잡고 한참을 들여다 봤지.

하얗고 손마디가 동글동글하니 통통한 손등에 건빵 배꼽처럼 쏙,쏙 우물이 세개는 선명하게, 하나는 쏟아질 듯 파였어 어찌나 이쁘던지
한참을 손을 만지며 황홀해 했지요
그러다 시커멓고 두툼한 내 손을 딸아이 손 옆에 갖다 대 보았어.
주름투성이에 손마디가 불거져 나오고 그나마 관절이 아파서 제대로 곧게 펼 수도 없는 손. 금방 부스러질 듯 윤기 없는 거친 손톱을 보며 가만히 있으니 딸이,

"엄마, 비교 상대가 안되는 걸 자꾸 들여다 보면 어떡해."한다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자꾸, 옛날 옛날로 생각들은 꼬리를 물고, 딸도 모르고 내 어머니조차 알 수 없는 내 손의 상처에 그만 화끈 데이고 만다. 하나뿐인 딸, 사는게 바쁘고 턱에 차는 가난으로 온전히 열 손가락 달린 두 손 상처 없이 지켜주지 못하였는데, 문득 그것도 섧고
내 딸의 손은 너무 이쁘고,... 그냥 만감이 낙숫물처럼 뚝뚝 떨어져 딸 손을 맥없이 놓아 버리고 내 방으로 와서 젖은 마음 쥐어짜며 깜박 잠이 들었던가.

글씨를 이렇게 또박또박 쓰는 일도 재미있네
한 획, 한 획을 생각이 앞서감없이 그렇게 또박 또박.
또박또박하니까 숙박계란 시가 생각나네

지금은 늦은 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빗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오는데, 그 속에 앵두잎새를 타고 내리는 빗방울 소리는 유독시리 툭, 툭, 투두둑......




숙박계


이 덕규


늦은 밤 후미진 골목 여인숙 숙박계 막장에 나를 또박또박
적어 넣어 본 적이 있으신가?

밤새 오갈 데 없는 어린 눈송이들이 낮은 처마끝을 맴돌다
뿌우연 창문에 달라 붙어 가뭇가뭇 자지러지는

그 어느 외진 구석방에서 캐시밀론 이불을 덮어쓰고 또박또박
유서쓰듯, 일기를 써 본 적이 있으신가?

이른 아침, 조으는 주인 몰래 숙박계 비고란을 찾아 '참 따뜻
했네' 또박또박 적어 놓고

덜컹 문을 열고 나서면 밤새도록 떠돌던 본적지없는 눈송이
들을 막다른 골목 끝으로 몰아가는 쇠바람 속

그 쓸리는 숫눈 위에 가볍게 목숨을 내려놓듯, 첫발자국을 또
박또박 찍으며 걸어가 본 적이

있으신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그 가뭇없는 기록들
을...... 당신은 또박또박








혹여, 우리도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그 가뭇없는 발자국을
당신은, 나는, 또.박.또.박 같이 걷고 있는가
옆길로 샜네, 그러나 가끔씩 호주머니 속에 만지작 거리는
전당포의 전표같은..그러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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