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동맹 상순이

사월에 걸려온 전화/정일근

황금횃대 2007. 4. 5. 14:28

 

사월에 걸려온 전화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낮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生에 사월 꽃잔치 몇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고 말했지만
친구는 너,울지. 너,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지난 화요일 서울에 갔습니다

몸이 아파 용하다는 한의원에 진맥에 침도 맞고 약도 지을겸 갔습니다.

한의원은 잠실에 있더군요

서울 사는 언니가 내가 길을 잘 못찾을까바 마중을 나와 길 안내를 합니다.

신천역에 내렸습니다.

아! 신천역.

 

츠자적 한 총각과 연애를 했습죠

결혼을 한다고 둘다 단디 마음을 먹었던게죠

한 사무실에서 일하다 그는 서울로 새직장을 구해서 갔습니다.

지금은 환경부지만 그 땐 환경청이였세요

사무실이 잠실벌 교통회관 안에 있었습니다.

그가 보고 싶어 서울 갔다가 자고는 아침에 잠실까지 전철을 타고 같이 갔습죠

그는 내려서 먼발치 교통회관이 보이는 쪽으로 걸어가고

나는 그를 보내고 다시 왔던길을 되짚어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잠실벌이 그야말로 이십년전에는 황량했습니다.

은빛 오리털 파카에서 삐져나온 오리털이 제 오바 옆구리에 묻어 바람에 나부끼지요

겨울이니까 신천역 돌아가는 길은 칼바람이 육실허게 불었습니다.

 

그러다 연애는 끝나고 같이 앉아 마시던 일회용컵은 백년을 간다는 공공캠페인처럼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백년가약을 맺은 사람에게로 갔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소식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오년전인가 육년전인가 다른 선을 통해서 그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언니야, 내가 전화번호 알려줄게 전화 한 번 해바바"

후배의 부추김과 궁금도 하던 차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했지요. 그가 여전했으면 나도 여전한 목소리였겠지요

내 이름을 말하니 그가 모르겠다고 합디다.

 

그 세월을 모르겠다니요, 그 세월이 차마 잊어질라구요

그런데도 그는 모르겠답니다.

전화를 끊었어요. 사람이 뜬금없이 당황하면 엉뚱한 말도 나오겠지

그 후로 다시는 전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나는 그에게 잊혀진 여인이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는 지금 교통회관에서 일하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신천역을 올라서 롯데앞을 지나며 송파구청 앞으로 걸어가는데

다리가 자꾸 휘청거립니다.

추억은 멀고도 먼 아득함 속에 또아리를 틀었을테고

나는 잊혀진 여인으로 동안 편안하게 살았는데도 말입니다.

 

옆에 언니가 없었다면 나는, 그 바람모퉁이에 길 잃은 여편네가 되어

오래도록 방향을 잃고 넋나간 모습으로 서성거릴 뻔 했습니다.

시간은 야속하지요

그 때의 팔팔하던 내가 지금은 기진하여 한약이라도 한첩 먹어보고 기운을 차릴라고 용을 쓰면서

한의원을 향해 길을 걷습니다.

 

그러고 집에 와서 어제 저녁 그녀의 전화를 받습니다.

예, 예, 이제 그렇게 살지요, 예, 예, 고맙습니다 하는데 왈칵 목젖이 뜨거워집니다.

때마침 고스방이 들어와 전화를 끊는데 멋모르는 서방은 어떤 놈하고 전화를 하길래 내가 오니까 끊냐며

농담을 합니다.

 

고만 울음보가 터져서는 꺽꺽 웁니다.

맨날 무쇠같던 여편네가 요새는 맨날 비실비실하더니 급기가 넋이나가게 울어대끼니 왜 우냐고 물어요

힘이 없어서..

벌써 이렇게 기진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 되서..

몸은 자꾸 안 좋지

사는기 암담하고 깜깜해지지

울음소리에 뒷말은 자꾸 잦아듭니다.

 

서방이 나를 눕히더니 아모 걱정마랍니다

걱정은 내가 다 할테니 니는 편하게 있어라 합니다.

그래도 한번 터진 울음은 쉽게 그치질 않고 여진처럼 흔들리며 눈물이 솟구칩니다.

한풀이하듯 울었재요

참말로 철없고 못났습니다.

그녀르꺼 교통회관이 뭐 어쨌기에요

제 마음이 한껏 약해진 줄은 모르고.

 

 

*사월에 전화를 걸어 준 그대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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