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진주 귀고리

황금횃대 2004. 10. 21. 10:35
반갑잖은 놈 삿갓 들시(들춰)가면서 인사한다더니

며칠전, 은비애비가 아랫녁을 갔다 온다면서 내게로 왔다

한때는 그에게 익숙했던 삽작 골목이였으리라.

나락멍석에 나락 퍼 담는다고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고무장화를 털레털레 신고 나갔더니

궐놈은 뭐 줄게 있다고 내 손에 덥석 뭘 쥐어준다

신문을 통해 익히 보아왔던 <진주귀고리 소녀>라는 소설책이다

소설이고 시집이고 이즈음 손 놓은지 오래니까 책의 부피감으로도 어깨가 무겁다

저녁 먹고 가라고 소맷부리를 잡는데 놈은 나하고 밥 먹기가 싫은가 윗옷을 아예 벗고는

아방태에 올라탄다.

정신차리고 살라고 그 갸냘픈 어깨죽지에 책으로 한방 때렸다. 한쪽 가슴이 무너지는걸

놈은 검은 안경탓에 보지 못했으리라.

철둑 비얄에 작은 돌맹이들도 따라서 주르륵 흘려내렸다.

길을 따라 멀어져가는 아방태의 궁뎅이를 바라본다. 무엇이 바쁜가, 제놈이 바빠봤자 저녁

한끼 같이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필경 낮에도 아무것도 안 먹었을 것인데.

집구석에 돌아와 된장에 꽁보리밥을 비벼먹는다.

책을 들고...차암 오랜만에 누워서도 보고 베개를 공가놓고 앉아서도 보고, 화장실 갈 때도

들고가서 보고, 자러 들어가서도 베개 하나 더 꺼내 거기 걸쳐놓고도 보고...그렇게 보고나니

눈에서 눈물이 난다. 왜긴...눙깔이 따가와서 그렇지

그러게 책도 다 읽을 때가 있는거야. 고서방 옆에 앉으면서 <책 보니까 눈물 난다> 그랬더니

들락날락해서 뭐든 다 알고 있다는 인상을 지으며 <것봐 여편네가 맨날 컴인지 지랄인지

맨날 들다보더니 눈이 맛이 갔구만> 한다. 이 얼마나 정확하게 내려놓는 핵심인가. 책 내용이

슬퍼서 그렇게 눈물이 나지? 뭐 이런 말은 죽었다깨나도 안 한다.

책 끄뜨머리에 그녀의 손에 건너온 진주귀고리

뭐 이런저런 함축적인 의미는 땔치우고, 나도 진주귀고리가 문득 하고 싶어졌다

그런 사연이야 뭐 필요한가? 잘 아는 아저씨한테 전화 걸어서 내가 진주 귀고리가

하고 싶어졌다고 이야기하면 될걸.

그 아저씨가 누구냐고 궁금해 하지마라

그리트가 전당포에서 진주귀고리를 팔아서 받은 이십길더 중, 고기값 십오길더를 제하고 남은

오길더의 행방만큼이나 비밀스런 이야기니까

정 알고 싶다면 이름만 알려주지.

그의 이름은,

키다리 아저씨!


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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