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별로 외상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살다보면 사소하게 외상을 걸어 놓을 일이 생긴다
지난 화요일에는 목욕탕을 갔는데 달랑 오천원을 들고 갔다. 목욕을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좁은 옷장안에 옷을 구겨 넣으면서 잘못 접혀진 부분으로 목욕비를 지불하고 남은 동전이 뚜르르 흘러 목욕탕 대기실 마루 밑으로 굴러 가는 걸 벌거 벗은 몸을 구부려 줍는 일은 참말로 민망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목욕탕에 갈 때는 딱 맞게 삼천오백원을 들고 간다. 그러나 그 날은 오천원을 들고 갔음에도 목욕탕 돈 받는 작은 창 옆에 쌓아 둔 <때비누>가 번쩍 눈에 띄는 것이다. 빨래비누처럼 커다랗게 생겼다. 색깔도 세탁비누처럼 누리끼리하다. 비누 색깔보다 더 누렇게 뜬 주인아줌마에게 때비누의 가격을 물으니 삼천원이란다. 목욕비 제하면 거스름돈이 천오백원 밖에 되지 않으니 천 오백원은 외상이다. 나중에 시내 나올 때 갖다 드릴테니 때비누를 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흔쾌히 그렇게 하란다. 목욕탕 안에 들어가니 목욕하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다. 마악 다 씻고 나온 사람이 온몸에 샤워코롱을 바르면서 옷 입을 준비를 한다. 나는 굴러 떨어질 동전이 없는 옷들을 벗어 좁아터진 옷장에다 차례로 포개놓았다. 등때기를 불려 때비누를 솩솩 칠하면서 외상이 습관화 될 우려를 흐린다
어제는 어머님이 선지국을 끓이게 소내장을 사오라고 한다. 돈 이만원을 내가 앉아 로션을 바르는 몸통 뒤에다 던지시면서 연지엄마(동서)한테 토종식당 소 잡으면 소내장 부탁해놨는데 오늘 소 잡아왔다고 선지 사가라고 전화가 왔다면서 내장 사면 소피는 그저 주지 않느냐고 묻는다. 저번에 동서가 끓여서 한 냄비 갖다 준것이랑, 대구 형님이 오시면서 아버님 뭘 잘 드시냐고 물으시길래 내가 딴 거는 냅두고 앞산 대덕식당가서 선지국이나 한바게쓰 사 오세요 했더니 정말 형님은 삘건 플라스틱 바게쓰에 선지국을 가득 사왔다. 그걸 다 먹고 하루쯤 국이 빠졌나? 선지국 대신에 내가 다른 국을 끓였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그놈의 선지국 실컷 드시게 해야지 싶어 선지국을 또 주문하였던게다. 그걸 다 먹었으니 선지국 어지간히 질릴 때도 되었건만 소 잡았다니 또 선지국이다.
선지국 끓이는 일이 조금 번거롭기는 하다. 그러나 올뱅이국보다는 훨씬 한 가지 공정이 빠져서 좀 수월타. 시뻘건 선지를 삶고, 내장을 삶고 밭에가서 배추 뽑아오고 무우 뽑아와서 삐져넣고...그렇게 국을 끓이니 꺼리가 많아서 곰솥으로(내가 씨름해서 타온 솥) 두 솥이 족히 나온다. 그렇게 많이 끓였지만 나는 간만 보고 입에도 안 댔다. 내가 그녀르 선지국 먹으면 성을 가니마니..하면서 속으로 모진 다짐을 두었다. 국을 끓여서 아버님 드리니 아버님이 비린내가 나신다며 안 드신단다. 비린내는 무슨 비린내. 어머님은 이게무슨 당치도 않는 소리냐며 두 그릇을 드시면서도 연신 아버님께 먹어보라고 권하는데, 아버님은 급기야 버럭 화를 낸다. 매번 먹는 걸로 아버님이 화를 내는데도 어머님은 매번 먹는 일에 목숨을 거신다.
선지 사 오면서 파가 없으니 파를 사 와야하는데 선지 만 팔천원어치사고 이천원 남은 걸로 파를 사려니 또 돈이 모자란다. 파 한 단에 삼천원이랜다. 또 천원 외상이다. 외상이 두 군데나 걸려 있다.
그리고 저녁에 컴퓨터 가르치러 미장원 아줌마 한테 갔더니 아줌마는 안성식당 고모님 머리를 말고 있다. 중화제 바로고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오늘은 강의를 받을 수 없단다. 한참 미우나 고우나..하는 일일연속극을 보는데 마지막 장면쯤에서 애견센타 주인집 딸이 오빠에게 술 한 잔 사달라해서 맥주 한 잔 손에 모둬쥐는 장면이 나왔는데 울컥 술이 고프다. 그래 .....그거 였어. 그 동안의 결핍은 모두 알콜함량이 미달되어서 그런거야. 연속극이 어찌됐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주차장 찬숙이네 식당으로 끌리듯 걸어갔다. 가게에는 시커먼 남자가 혼자 감자탕 뼉다귀를 밝아먹고 있다가 들어서는 나를 뜨악~쳐다본다. 찬숙이도 나의 등장에 놀랜다. 내가 저녁시간에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아니니까.
"야이, 어쩐 일이라?"
"술이 고파서 왔지. 나 술 한 잔 다오"
"술이야..얼매든지 있지만 니 무슨 일이 있나?"
찬숙이가 눈치를 살피며 올라오라면서 방석을 내어준다. "일은 무슨 일...그냥 연속극 보는데 여자 탈렌트가 맥주를 마시는데 나도 어찌나 먹고 싶던지 무작정 왔네"
"그래, 그래...얼릉 앉아. 술은 뭐 주꼬?"
"씨원한 맥주 한 병 일단 줘바"
자질구레한 것들이 얹힌 상 우에는 먹다 남은 꽈배기 과자가 딩굴고 있다.
"안주 필요없고 이 꽈배기하고 한 잔하면 되겠네 괘히 귀찮채~"
"귀찮키는.. 자, 잔 받으라.."
찬숙이가 시원한 맥주를 찰랑찰랑 넘치도록 따뤄준다
그리고 한 귀퉁이 썩어가는 배를 내와서 과즙을 철철 흘리며 깎아 준다
완 샷!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으로 콸콸콸 넘어간다.
맥주 한 병 가뿐하게 마시고 약간 어찔하니 그 몰아의 경지로 또 들어간다.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세상 일을 씨부린다.
티비에는 이명박, 이회창...이씨들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고..
"찬숙아 있잖아..내가 그냥 아무 먹은 맘 없이 나오는 바람에 돈을 안 가지고 왔데이. 맥주 한 병 묵은거 외상이라. 내일 내가 이쪽으로 오는 일 있으면 갚아줄게, 미안해"
"아이구, 내가 뭐 돈 안 받아도 된다. 가끔 이래 나와서 한 잔씩 해라"
"아이다, 내가 내일 꼭 나와서 갖다줄께"
술을 먹어 가슴이 훈훈해 지는게 아니고, 그냥 친구가 이렇게 외상친구도 환하게 받아중께로 좋아서..하염없이 기분이 좋아서. 나의 외상인생은 계속된다. 홍야홍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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