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일상

황금횃대 2008. 1. 16. 19:50

입에서 단내가 난다.

스방 등이나 긁어 주고 먹고 살 때는 몰랐다.

서방 등때기에 칼바람이 묻어 오면 서둘러 털어 낼 줄만 알았지

아침 아홉시 이십분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면 허벅지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일 나가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다.

한 십분 정도 도로를 달리면 손가락과 볼때기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다.

준비해간 무릎 담요를 끌어덮는다. 어쩌다 바람 방향이 엇갈리는 공간을 지날 때는 담요가 미끌어져내린다.어어,시릿햐~

스쿠터는 산그늘 아래를 천천히 달린다. 바람이 차다 못해 따갑다.

 

이 엄동설한에 친정 아부지는 노가다를 해서 우릴 키우셨다

또,그럭장사를 하시며 우릴 키웠다. 종일 리어카에 그럭을 싣고 다니면서 못쓰게된 양은 그릇과 새 냄비를 교환해 주었다. 아버지의 리어카는 늘 알미늄과 스뎅 부딪는 소리가 났다.

장갑을 벗으니 손이 쭈글쭈글하다.

나도 이제 살이 빠져 나가는 나이가 되었다.

추위에 손이 곱으니 뼈마디도 쉽게 펴지지 않는다

얼어붙은 턱을 몇번 쓰다듬어 마찰열을 일으킨다. 턱뼈가 덜거덕거리며 움직인다.

"어제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어요?"

포준말로 나는 또박또박 묻는다

"한글을 띄워보세요. 그리고 어제 숙제 내드린거 그거 함 불러와 보세요"

 

할아버지의 굽은 손마디가 슬픈 더블클릭을 한다.

"따닥 따다닥, 이기 잘 안대요"

"그러면요 아저씨 오른쪽 마우스를 딸깍 해보세요'

클릭이란 말은 멀고 딸깍이란 말은 가깝다.

 

저녁에 친정집에 전화를 했더니 오촌아지매가 오늘 돌아가셨단다

경남 합천군 청덕면 하회리에 살았다.

낙동강 허리가 마을 뒷편을 유유히 흘러서 적교쪽으로 흘러 창녕쪽으로 방향을 가닥 잡는 동네였다.

오촌아지매가 사는 마을은 새마을이였다. 동네 뒷편에 농협창고가 있었다

거기서 나는 육촌 오빠를 만났다. 지금은 수원에서 꽤 잘 사는 부자가 되었지.

 

육촌형제는 여럿 되었다.

또래 형제간이 있어서 나는 자주 청덕에 갔었다. 지금도 버스 젤 뒷좌석에 앉아 고르지 못한 비포장 길을 갈 때 버스가 펄쩍, 들고 뛰던 기억과, 마른 땅에 뽀얗게 먼지가 일어 버스 꽁무니를 따라오던 기억이 난다. 적교를 건너고 강 옆으로 난 벼랑길을 산쪽으로 바짝 붙여 운전하던 완행버스 기사아저씨와 멀어져 가던 먼지 덮어 쓴 가로수들, 버스도 사람도 내려서 배를 타고 건넜던 땅콩 사래가 지겹게도 길었던 나루터를 기억한다.

 

                                                 <적교에서 내려다 본 낙동강-넘의 것 오베옴>

 

그 집, 둘째딸 상옥이는 나와 동갑이다. 나보다 생일이 늦어서 언니라고 불렀다.

아침이면 내가 눈 뜨기도 전에 일어나 불 때서 아침을 하고, 웃목에 있던 시루에서 콩나물을 뽑아 추려서 아침국을 끓였다. 아침 밥 하느라 짚불을 때면 아랫목이 따뜻해져서 나는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오빠는 일어나 쇠죽을 끓였다. 사랑방에 오촌당숙은 곰방대에 담배를 눌러 담으며 가래끓는 소릴 내었다.  쇠죽솥이 걸린 가마솥 위의 봉창을 열고 가래를 뱉으며 오빠에게는 잊지 않고 여물을 푹익게 끓이라, 솥뚜껑 밖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야 되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셨다. 고2였던 오빠는 어제도 듣고 그제도 들었던 똑같은 소리를, 아니아니아니아니 고사리 손으로 소죽 끓이기 시작한 때부터 들은 이야기를 아모 반감없이 들었다.

 

아지매는 당숙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숙은 별 말이 없었는데 아지매가 좀 사람을 긁는 스타일이였다. 보면 잔소리부터 시작해서 욕을 하며 끝을 맺었다.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았는데 자식은 여덟을 낳았다. 예전에는 그런 일들이 흔했다. 한 집 건너 한 집에서 여덟 아니면 열이나 열 하나쯤의 자식을 낳아서 더러는 잃고 더러는 키우던 시절이였다.

 

오빠랑 산에 나무를 하러 가기도 했다. 그 때만해도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산림감시원에 걸리면 고발을 당했다. 소나무 하나 해 오려면 며칠을 톱을 가지고 가서 살살 밑을 조금씩 쓸어놓았다. 나무는 물기가 올라가지 않으니 시남시남 말라 죽었다. 그러면 날을 받아 작정을 하고 올라가 발로 나무를 탁 차서 넘어뜨리고는 작업을 해서 풀숲에 감춰두고 몇 동가리씩 나눠서 가져왔다. 톱은 보자기로 싸서 등 뒤에 감추고 그 위에 옷을 입고는 산을 내려왔다. 겨울이라도 묏등 뜰팡은 따뜻했다. 오빠랑 양지바른 묏등 앞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했었다. 둘다 늦은 사춘기였다. 면단위 농업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연애사건을 오빠는 신나게 재구성해서 들려 주었다. 낙동강을 날아 오른 물새가 마을 들판까지 경계를 넘어 날아 오기도 했다.

 

아무것도 새로울게 없고 아무것도 새로운게 찾아 오지 않는 나른한 촌동네

하루에 몇 번 지나가지 않는 직행버스가 지나갈 때쯤이면 바깥에 나와 서성이였다. 대구에 살면 그런 고적감이 없었을 것인데 나는 그곳에 들어가 번잡함을 그리워했다. 아니다. 번잡함이 그리운게 아니고 고요로 박제된 공간에 비행기에서 실수로 내 발 앞에 떨어진 보급품같은 ..거 머라고 해야하나..뜬금없이 찾아오는 무엇이 그리웠던게다. 그래서 직행 버스가 지나가는 시간에는 슬그머니 삽짝문을 나와서 대문 앞에 앉아 버스가 동네 앞에 서 주기를...그 버스 발판을 밟고 내려서는 발길이 있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닭대가리든, 고등어자반이든..그런 것은 중요하지가 않았다. 그저 차가 지나가다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문득 멈춰서고, 거기서 무엇이든 땅을 밟고 내려오는 기척이 있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

 

내게는 오촌당숙이지만 아버지와는 사촌간이다. 아버지의 형제간이 단촐했기에 아버지는 사촌형님인 당숙과 잘 지냈다. 아지매도 우리집에 자주 놀러 오셨다.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자주 오고 갔다. 농사지은 찹쌀 한 됫박, 고구마 몇 개, 풋고추 한 사발, 쑥절편 한 봉지....이렇게 작은 것들을 바리바리 보자기에 싸서 집으로 왔고, 엄마와 아버지는 늦도록 옛날 이야기를 하며 밤을 밝혔다. 아저씨가 돌아 가셨을 때 유택이 문제가 되었다. 육촌 오빠들도 경황이 없었고. 그래서 큰아부지가 우리 선산에다 당숙의 유택을 허락했다. 그 때도 큰어머니는 절대 안 된다고 했으나 큰아버지의 결정을 꺾지 못했다. 그 다음에 큰아부지가 돌아가셨고. 큰 아부지는 돌아가시면서 유언으로 큰어머님 돌아가시면 당신과 합장을 하라고 이르셨다. 어제 초상집에는 당숙모의 유택 문제로 난리가 났다. 큰어머니와 울 엄마가 절대 당숙 옆으로 못 오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집에서는 당숙과 돌아가신 아지매를 절대로 합장을 못하겠다는 것이다. 합장을 한다고 해도 허락할똥말똥 똥이 두덩거린데 따로 쓰겠다하니 더욱 일이 어렵게 되었다. 엄마는 한발 뺐는데 따로 쓰는것은 언감생심, 합장도 안 된다는 것이다.큰엄마는 요지부동이였다. 육촌 오빠들은 그냥 이야기하면 당연히 들어 줄 것으로 믿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모른다. 큰엄마가 왜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일은 안 되는 일이라고 저렇게 반대를 하시는지. 큰엄마와 큰아부지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그래서 내 큰동생이 족보에 양자로 가있다. 큰아버지 돌아가시고 큰엄마는 큰동생에게 의지를 많이 하신다. 그러나 이 일 만큼은 동생에게 입도 떼지 말라고 다짐을 둔다. 친정아부지는 상가집에서 양쪽에 중재를 하느라 식은땀이 나신다. 큰엄마는 밤까지 거기서 보내며 산소를 볕재에 못 쓰게 막고 있다. 새벽에 몇번 전화가 오고 가더니 결국 부산 실로암 묘지로 모신단다. 큰엄마가 이겼다. 우리는 모른다. 큰엄마 가참말로 왜 그렇게 반대를 하는지. 살아생전 큰엄마와 아지매 사이에 무엇으로 맺힌 일이 있어 마지막에 가는 날, 큰엄마가 얼음같이 차갑게 고삐를 틀어쥐는지.....개인의 역사도 이렇게 흐르고, 집안의 역사도 그렇게 흐르고....인류의 역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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