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헝겊 / 박기섭
순금의 가락지 하나. 그대 살 속 가락지 하나
이 다음 훗승 가서도 삭지 않을 가락지 하나
모란꽃 환한 후원後苑에 다시 천추가 온다 해도
머리맡에 풀어 놓은 언약의 비단 헝겊을
무시로 가슴 갈던 쟁깃날에 동여 두고
풀 끝에 아슬한 꿈마저 둘러 끼울 가락지 하나
새/ 박기섭
저 가뭇한 하늘가에 발을 오그린 채 숨을 멈춘 한 순간에
비상은 완성된다 그제사 새가 새로서 현현하는 것이다
가장 높이 나르는 찰나의 절정을 위해 새는 쉬임없이 부리
를 닦아내고 바람에 죽지를 씻으며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솟구쳐 오를 적마다 새의 눈은 깊어져 텅 빈 고요 속에 세
속의 뼈를 묻고 에굽은 그 하늘길을 바스라져 가는 것이다.
-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중에서 -
1954년 대구광역시 달성 마비장에서 남.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조집으로 '덧니', '키작은 나귀타고', '비단헝겊'등을 출간.
오늘의 시조문학상, 중앙시조대상을 받음.
우리집에 인터넷이 연결된지는 9년이 되었다. 그 땐 에이디에스엘인가 뭔가 그건 없고 그야말로 원시적 전화모뎀으로 했다. 접속 한 번 할래도 삼십분은 족히 걸리고, 그렇게 어렵게 접속이 되어도 뜬금없이 끊어져버려 한참 채팅에 눈 시뻘겋게 설치던 나를 열받게 했다. 주야로 붙어 살았으니 전화비야 오즉했겠는가. 전화비가 그렇게 많이 나온 걸 알면 지금이라도 고스방 컴퓨터 때기나발 칠려고 맨발로 뛰어 들어 올거다.
서방 잠 들면 몽유병 환자처럼 잠자리를 빠져 나와 아이들 방으로 건너와 컴을 켜고 모니터 속에서 잠 못들고 나같이 철없는 새로움에 맛이 간 아지매와 아저씨들과 이야기 하느라고 날밤 까기를 몇 날이였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어떨 땐 아이들 창문에 새벽이 푸르스름하게 비춰올 때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러고도 아침밥을 해대고 포도밭에 순지르러 일을 나갔다. 다~아 젊어 한 때의 일이다. 지금 그렇게 하라믄? 어이구 죽었다 깨나도 못 햐!
그 때가 9년 전이니 서른 말년쯤 되었나보다. 매번 입에다 서른 여덟, 서른 아홉, 야호 이제 마흔이야..소릴 달고 다녔으니. 손가락이 자판을 두드리는 속력도 대단했다. 지금은 기껏 긴장하고 문장을 쳐봐야 분당 삼백타정도 될까? 그만큼 손도 무뎌지고 눈이 글을 읽는 센서도 무뎌졌다. 그 땐 내 생각을 타자로 치는 경우는 거의 오백타 수준은 되었을 거다. 그러니 내가 타자를 치고 나면 한참 뒤에야 글자가 모니터에 나타났다. 컴퓨터 사양이 구려서 그런거라구? ㅎㅎㅎ 과연 그럴까.
누가 그러더만. 뭐니뭐니해도 인생의 황금기는 삼십대라구.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병원문턱을 넘나들고, 부엌에서 양념 냄새를 피우며 부산을 떨고, 하기 싫은 설거지에 냉장고 몬스터를 잡으면서 살고 있는데 그 때의 감성이 없다.
며칠 동안 내가 끄적거려 놓은 것들을 정리하는데 아무라도 그런 생각하겠지만 삼십의 나이를 외투로 걸치고 다닐 때의 감성이란 보석처럼 빛나는 것이여서 무엇이든 건드리면 그것들은 반짝반짝 빛을 내며 내게 다가 왔다. 그걸 옮기는 손에도 은총이 아침 햇살처럼 퍼부어졌음은 말 할것도 없고. 읽다보니 눈물이 다 난다. 세상에 내게도 이런 총기 있던 시절이 있었단 말이가!
시조 공부를 갈채주신 찬솔새임은 늘 내게 말씀 하셨다.
"부지런히 지금 나이에 갈고 닦으세요. 그리고 잘 꿰어서 간직하세요. 그게 하냥 내게 머물러 줄줄 알지만 그렇지를 않아요" 조근조금 말씀 하실 때 그냥 흘려 들었다. 그걸 하찮은 것이라 여겼다. 아니 아니 그게 오래오래동안 내 옆에 매달려 찧고 까불고 아양떨며 곁에 붙어 있을 줄 알았던게다. 그러나 아니였다.
속절없다는 말이 여기만큼 실감나게 쓰여질까.
눈이 온다.
어제는 비가 오고 오늘은 눈이 온다
우산 들고 비를 긋고 다니던 어제야 그 물기 촉촉한 빗방울이 오늘 저렇게 쌩그렇게 얼어 눈이 될 줄 어찌 알겠나. 세상이 일이 그렇지 뭐..하고 피식 웃고 지날 때는 아니지. 뭔가를 야무지게 다잡아야지. 그런데 뭘?
마흔 여섯이란다.
내 가계부에는 딸래미가 표지에다 <46살>이라고 커다랗게 써놓았다.
글 정리를 하다보니 남편의 나이 마흔 여섯이 되었다라고 시작하며 쓴 글도 있다. 스방이 늘 나보다 오년의 생을 앞서 살고 있는데 나는 지금 그 나이가 되어 무얼 느끼는가.
눈이 펄펄 내린다.
먼데 님이 보고 싶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눈 때문이지......
*찬솔새임이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메일로 보내주셨던 박기섭 시조시인의 시들. 그 새임도 며칠 전 <잊혀지는 것은 쓸쓸하고 슬픈일..>이라시며 문자를 주셨네. 농사꾼은 겨울이 좋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하냥 그런건 아닌게비여
찬솔 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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