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농사 장 담그기
지난 늦가을 빚어 놓은 메주가 떡치 한 치만큼 곱게 뜨다
흰곰팡이
노란곰팡이 두어가지 색을 맞추어
먼지 씻어내고, 메주 한 장에 소금 네 되, 물 한 말을 맞추다
베 보자기 깔아 맑은 물 부으면
슬슬 소금 속살이 녹고,
지난 묵은 장물을 작은 독에 옮겨 놓는다
바람이 머물다 가고, 오뉴월 사시사철의 햇살이 투영되었다
비껴났다
봄날 살구꽃 그림자가 장독 뚜껑에 시나브로 올라 앉았다 콩 볶는 소리로
소나기 한 울음씩 때리고 가던 물 열 말은 족히
품을 배통 큰 오짓독.
텀벙텀벙 녹인 소금물에 메주덩이가 떨어진다
숯 두어덩이, 붉은 고추 서넛, 참깨 한 줌이 고명처럼
들어간다
큰 것들과 작은 것들이 무슨 교감으로 장맛을 만들어낼지..
오짓독 테두리에 새끼줄이 쳐진다
아무런 부정없이
맑고 감칠 맛나는 장이 우러나오도록.
장독간을 씻는다
많은 것들이 머물다 간 흔적들이 얼룩으로 남았고 물 행주질에 검은 물이
쏟아진다.
금이 가서 더 이상 쓰지 못하는 독들이 뒷뜰 담 밑으로 졸래리 올라간다
사람을 살리는 살림에 없어서는 아니 되었던 지난
시절의 영화를 장독간 자갈에게 고요한 자죽으로 남기고, 담벼락 귀퉁이로 올라가렴.
이제는 쉬어도 되리
물을 담지 않아도 짠
소금을 담지 않아도 된단다
백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삭혀내던 수고를 멈추고, 비바람, 눈보라에 한 방울의 틈입도 허용치 않던 긴장을
놓아두고 이젠 새 봄에 가죽나무 붉은 순이 나거등 구름 그림자로 볕을 가리고 이쁜 고것들이나 구경을 하렴.
담벼락에 햇살 들어, 여린
담쟁이 손들이 바람에 흔들리면 바삐 가는 걸음 잠시 멈추고 쉬었다 가라고 옷소매나 붙들어 주며.
가슴팍 구석에 빛나는 훈장을 걸어
주지 못해 미안한.
그러나 늘 편하고 고마운 오짓독의
아름다운 퇴진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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