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대추를 따다가 몇 날 며칠을 말렸는지 손가락을 꼽아가며 날 수를 기억할 수는 없다. 볕에 바람에 이슬에 서리에..
대추는 그렇게 짙은 붉은 피톨로 온몸을 물들였다. 물들이는 과정이 어찌나 힘들었는지 탱탱하던 피부가 쪼글쪼글해졌다.
시어머니는 하루 종일 바람부는 쪽마루에 바람을 등지고 앉아 대추를 골랐다. 성한 것들은 검은 나락망태기 속으로 들어가고
얽먹고, 벌레가 먼저 시식하여 상처가 난 것들은 따로 모아졌다. 버리니 아깝고 먹자니 거시기하고..그런 것들을 큰 솥에 물을 잡아 한 나절 내도록 다렸다. 해가 넘어가고 별들이 구름 사이로 나오는 것을 보며 불을 껐다. 솥뚜껑을 열어보니 그렇게 삶았는데도 대추는 모양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동동 떠있다. 밤새도록 서리를 맞으며 대추 고은 물은 식어갔다.
닭이 울고 해가 뜨고 사람은 아침이란 걸 먹는다. 그 준비 과정은 온통 내 몫이다. 쌀을 팍팍 치대 씻어 쌀뜨물을 탑탑하니 받아 시레기 국을 끓인다. 멸치 갈은 것을 넣고, 그 외에 몇 가지의 맛내기 보조재료가 더 들어간다. 뿌스리한 쌀뜨물이 시레기 치댄 된장을 껴앉으며 국물은 된장색으로 변해간다. 우리의 정서는 그렇다. 저 황톳물같은 색감의 저 색이 유전인자인냥 반갑다.
그렇게 열심히 아침 밥상을 준비한다. 시레기국에 마악 청양고추를 다져 도마째로 들어 올려 국솥에 칼로 끌어 넣는데 어머님이 나오신다. "야이, 바깥에 나가 저거 좀 들고 온나" 저거는 굳이 고유명사를 말하지 않아도 어제 한 나절 닳인 대추물을 말하는 것이다. 들통을 들고 나가 대추째로 퍼온다. 좁은 부엌에서 어머님은 그걸 대추살을 빼낸다고 양푼이를 꺼내라, 거를 체를 내놔라. 대추물이 차가우니 물만 따뤄서 다시 끓여라...아침은 언제 먹냐 젠장..
나도 뒷수발을 들어주며 가만히 있을리 없다. 튀어나온 주둥이로 몇 마디 지낀다. 아침이나 먹고 이런걸 하면 좀 좋아? 아침 먹는 새, 서리 맞아가며 식은 대추가 쉴리도 없는데..구시렁궁시렁..비 오는 날 애장터에서 무엇이 와글짜글 떠드는 소리는 아닌데도 내 소리에 내가 시끄럽다. 그러다가 에혀~ 하며 한 숨 한 번 쉬고는 입을 닫는다.
대추를 다 걸러낸 어머님이 대추껍데기와 양푼이 서너개, 거름체며 설거지 꺼리를 한 보따리 내가 서 있는 발 밑에 밀어 놓는다. 그러고는 걸쭉해진 물을 한 그륵 떠서는 아버님께 드린다. 아버님이 한약색같은 대추물을 보더니 이 뭐냐? 하며 치어다본다.
"대추달인 물이여. 몸에 좋아 어서 먹어둬"
마지못해 아버님은 사약 한 사발 들이키는 것처럼 마신다. 한 식경 지나 시내 사는 막내 아들이 집으로 들어 오자 또 무릎 걸음으로 부엌에 가시더니 예의 한 사발 떠와서 먹으라고 종용한다.
오후가 되었다. 점심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동네 사람들이 공동구매한 소금값 받으로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니 어머님이 또 대추물을 만지신다. 양재기에 한 양재기 떠서는 바깥에 있는 아버님과 아들에게 한 대지비씩 떠서 멕인다.
그러는 동안 나한테는 이거 맛이 괘안나..하고 물어보지도 않고 먹어 보란 말도 없다. 나는 그거 안 먹어도 내 인생이 심하게 건강하고 몸이 좋다는걸 안다. 그러나 그거,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것, 그러나 몸에 좋다고 영감과 아들한테는 두 그릇씩 퍼다 엥기는 것, 그것, 그것,. 며느리 한테 한 컵 주는 것도 아까울까?
이런 날, 오십만원짜리 보약 한 재 지어 혼자 먹어야지 하는 야멸찬 욕망이 불끈 생기기도 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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