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영어로 하면 네버 엔딩스토리라고 하나요?
저, 지금 취팅이예요. 아랫집 할무이 돌아가시고 처음 이렇게 취햇어요. 어디서 술을 먹었냐구요? 주민자치위원 회의 끝나고 먹었세요. 지금 소주 한 병 마셨는데 알딸딸해요. 소주 내공이 많이 줄었어요. 소주 한 병에 이렇게 별천지를 맛보다니요?
어제는 아들놈 하숙집 때문에 낯선 전라도 땅에서 종일 헤맸어요. 오전 내도록 돌아 다녀도 하숙집을 못 구햇어요. 학교 후문 쪽 원룸단지까지 다녀오고는 그야말로 넉다운 상태였어요. 가계에서 돼지바 하나 빨아 묵고는 정신을 차렸어요. 둘째인 아들 놈이 드디어 독립을 해요. 애기같고 관공서 일이라고는 조또 아무 것도 모르는 아들놈이 오늘 제 이름으로 만든 농협직불 카드를 만들어서 내일 입학식을 한다고 즈그 누나와 같이 저녁에 전라도로 길을 떠났어요. 이제 아들놈이 내 손길에서 벗어 났어요.
그게 슬프냐고요? 천만에 말씀이셔요. 그냥...아무렇지는 않은데 해가 지고 비가 오니 마음이 좀 그래요
제가 심심 촌빨날리는 동네에서 이장질을 해요. 요즘은 농자금 신청 받니라고 좀 바빠요. 오늘도 집집 마다 돌아 댕기면서 농자금 서류를 받아 오후에 농협 대출계에 서류 접수하고 대환 할 농가는 대환 신청을 해 두었어요. 아참, 그거 아세요? 오늘 비안개가 끝내줬다는거... 너른 들길을 지나 자그마한 봇도랑 위에도 물안개가 피어 올랐어요. 산천, 마을 허리를 두르며 흘러가는 비안개의 자태를 말해 무엇하겠어요. 중국땅 장가계를 내가 가보지 못했지만 거기에 유유히 흐르는 안개 허리띠가 있었다면 여기 내 사는 동네의 오늘 안개의 고혹스런 자태를 거기 비교나 하겠어요? 그렇게 아름다웠습니다. 마치 옛 화백의 산수화 한 폭에 인생을 내건 그니의 여백처럼 안개는 산골짜기와 냇가 위를 그렇게 흘렀습니다. 내가 시집 와서 이 동네 이십여년을 살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안개가 골골이 여백을 메운 적은 없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워 슬프다는 느낌을 아시는지요? 농자금 서류 도장 받으러 갔다가 아무것도 모른 아저씨의 옷자락을 붙잡고 내가 감탄사를 날리며 아저씨께 말했습니다. 아저씨! 저 골짜기 안개 좀 보셔요!
안개는 흐르다가,머물다가,흩어지다가,사라지다가 하는 거지요? 거...누구나..아고, 술이 알딸딸하니 시인 이름도 생각이 안나네. 뭐더라..그래 기형도. 일찌감치 인생을 막실해서 씰데없이 애틋한 시인 기형도..그니도 안개에 대해서 뭐라뭐라 한 것 같에요 제목이 뭐더라...아고, 생각이 안나네. 이렇게 술은 기억의 물꼬를 엉뚱한데로 틔워놓습니다.
조치원..말고..안개..뭐라 한 시가 있는데.. 나이 오십이 가까와 뜬금없이 소주 한 병 마시면 상태가 이렇습니다. 꺼억.
우리집 스방놈은 술을 한 잔도 못해요. 그러니 술 마시는 사람의 심정을 알길도 없지요. 세상에 젤 소득없는 일이이 술광고랍니다. 자, 자, 스방험담은 그만하고.
오늘 내가 왜 술 한 잔을 과하게 해서 이렇게 알딸딸하게 취했는지 아시나요? ㅎㅎㅎ 그거 알면 진짜 용하시지. 동성로 한 가운데 빤스 한 조각 걸치고 비료푸대 깔고 앉으셔도 간지 줄줄 흐르세요. 오늘 이렇게 술 취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면사무소 계장이 적십자회비 모금액 가지고 한 마디 하는 것이예요. 눈깔에 쌍씸지 돋우고... 내가 볼 일을 퍼뜩 보고는 집으로 와서 시부모님 저녁을 퍼뜩 채려 드리고 나도 밥 한 숟갈 떠넣었는데도 여엉 기분이 찜찜한거라..주민자치위원 회의 끝나고는 저녁 먹는 식당으로 냅다 달려서 계장한테 술 잔 내밀고 술 한 잔 따뤄주고는 단도직입으로 물었습니다. 내가 뭐 잘 못 한 일있냐고.
눙깔 까꾸장하게 뜨고 술 잔 건네며 말하니 계장이 엇뜨거워 싶었는지 아까 자기가 한 말은 그런 의도가 아니였다고 말합니다.
소주 댓잔 아구리에 털어 넣고는 계장한테 취한 척 게아리를 묵습니다.
"계장님, 이 나이에 젤 참을 수 없는 건 뭔지 아세요? 소통의 부재래. 소통이 안되면 머리 꼭지 돌아브러. 나이 오십을 바라보면 무엇이 꿈이관데? 우주하고 소통하는 것이여. 그게 살아가는 제일의 가치관인데 계장님하고 나하고 소통이 안되면 그거 쓰것어? 안되지라...그래, 내 회의 하고 집에가서 시부모님 진지 차려드리고 한 숟갈 떠넣고 말면 될 일을 굳이 오토바이 타고 와서 술 한잔 건네며 계장님한테 말 건네는 뜻을 알것재요?"
그제서야 계장은 아까 자기 한 말은 그 뜻이 아니였네 어쩌네..하면서 눙깔 똑바로 뜨고 따져데는 여편네한테 변명을 해댄다. ㅎㅎㅎ그려? 그럼 됐구.
나는 말이예요, 바로 풀지 않고 뒤 돌아서 뒷담화 하는 인간이 젤 싫어. 직장 생활의 백미는 뒷담화라고 하지만 그건 이팔청춘한테 해당되는 말이요. 지금 나이쯤 되면 뭣이든 정면돌파를 해야재. 그래, 아까 내게 한 말의 진짜 뜻은 뭣이여요? 하며 술기운을 빌어 조근조근 물고 늘어진다. 메기매운탕 볼때기 살을 발라 먹던 계장이 깜짝놀라 뭐라뭐라한다. 그려? 그런 뜻이 아님 됏구요.. 자, 술 한 잔 받으세요.
비가 오는 날이였다. 새벽부터 빗줄기는 여름처럼 우렁찼다. 아들놈은 독립군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그게 못 미더운 서방놈은 종일 여섯통의 전화로 나를 닥달한다. 벽처럼 단단한 스방의 사고에 나는 온화한 기운과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지만 스방은 불안하다. 너무 끼고 살았던 휴유증이다. 나는 그냥 비오는 배경을 빌미삼아 만사가 심드렁해졌다 내 나이 마흔 여덟이면 우울증카드를 숫개 좆처럼 자랑하며 유세를 부려도 용서받을 처지다. 아직도 소주 한 병의 위력은 내 말초신경을 지배한다. 이렇게 미친년처럼 떠들고 나면 뭐가 좀 나은가? 거기에 대답은 할 수 없다. 단지, 의식과 무의식이 혼합되어, 아파도 아프지 않고 슬퍼도 이겨낼 수 있는 어떤 달뜬기분이 나를 지배하는 그 상태가 좋은 것일뿐.
결혼하고 이십 여년을 긴장 속에 살았다. 조금만 밥 때가 지나도 입을 삐죽거리는 시엄니의 얼굴과, 천년에 한번 날똥말똥 똥이 두덩거리인 효자서방과.....이렇게 술 취한 밤이면 그렇게 나를 지탱하는 팽팽한 피댓줄에다 면도칼을 대고 싶다. 흐....칼날이 닿음과 동시에 우주 속으로 피댓줄이 흩날리는 모습을...상상하며 나는 웃는다 그러나.
아들놈이 어제 가본 기숙사 방을 찾아 들어갔다고 전화가 왔다.
안도의 한숨.
그래..그래야지
탯줄 때부터 너에게 공급하던 줄을 이제 끊어야지.
저녁은 뼘가웃씩 깊어가고.
나는 비와 술과 너절한 생각으로 오랜만에
무.장.해.제.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