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회색노우트

황금횃대 2005. 6. 18. 19:43



 

 

 

1982년 11월 15일

루피나 수녀와 내가 로제마르땡뒤가르의 회색노우트란 책을 읽고 노트를 교환하여 쓰기로 한 첫발자욱을 뗀 날이다. 원래 띠보가의 사람들이란 장편 속에 있는 내용인데, 책 내용이야 왕년에 문소, 문청 시절을 겪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전11권의 책을 다 보지는 않았고 그냥 <회색노우트>라고 제목을 달고 나온 그 부분만 떼어서 읽었다. 그러고는 소설에 대해 종쳤다. 땡, 땡,땡~~

 

나야 뭐 학교 백일장에 시제가 나오면 대애충 유행가 가락을 옮겨 적고는 길고 긴 시간을 땡땡이치고 놀았지만, 루피나야말로 표 안나게 제 문학수업을 착실히 해 온터이다.

그녀는 직장을 다니면서 짬짬이 시를 써서 수녀원에 들어 가기 전까지 무려 세권의 자작 시집을 만들어 아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손수 그녀가 펜글씨로 써서 복사하여 제본까지 리봉으로 묶어 전해 줄때의 그 정성이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나는 그 때 시란 것을 시인이 아니라도 쓰는구나..하였다.

 

 

 


 

 

 

<회색노우트>라고 하기엔 조금 멋적어서 우린 공책꺼풀의 색을 염두에 두어 갈색 노트라고 이름을 지었나보다. 낡고 낡은 그 공책의 젤 앞장에는 공책의 이름과 권호, 그리고 누가 써재끼는가에 대해 아주 경건하게 써 놓았다. 앞서도 밝혔듯이 나는 글 하고는 아주 담을 쌓고 살았는데 루피나가 부산으로 취직을 해가는 바람에 전화도 귀한 시절이니 편지 밖에 소통의 길이 없었다.

그녀는 삼화라는 신발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하여, 신발공장의 낙후된 환경과 열악한 보수, 그리고 노동자와 중간관리자의 모든 애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보내오는 편지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분노의 시선과 딱함 그리고 그 상황을 제가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체념을 많이 써서 보냈다.

그러고는 서울 두산그룹으로 직장을 옮겼다.

나는 할아버지들이 옹기종기 주먹구구식으로 경영을 하는 주물공장 작은 하꼬방 사무실에거 주물 위에 돋아나는 붉은 녹을 바라보며 초짜 경리를 보던 때였다.

똥개는 짖어도 열차는 달린다더니, 글과 담을 쌓았어도  나와 그녀가 쓴 편지는 낙동강을 따라 흘렀고, 경부 상행선을 타고 넘나들었다.

 

 

 


 

 

 

처음 내가 쓴 글은 카프카의 <단식 광대>를 읽고 쓴 글이였다. 독후감이 아니고 내가 읽은 느낌과 젤 뒷장의 해설과의 괴리감에 몸을 떨며 내 독서의 수준이 이렇다 면서 넋두리를 늘어놓은 내용이였다. 주물 공장 누런 거래명세서 뒷장에다가 왼손으로 글씨 연습하던 것도 붙여 놓고, 스무살 내가 말이 되던 안되던 부단히 주끼댄 공간이였다. 누가 몰래 볼 일도 없으니 얼마나 마음 놓고 썼을것이냐.

 

 

 


 

 

 

거기에 반해 루피나는 공책의 면분할까지 면밀히 하면서 글의 호흡을 조절하며 썼는데 그녀와 나의 생각 차이와 문장구성 같은 것은 언감생심 비교가 될 수가 없었다. 나는 왈왈하는 승질을 글자에 그대로 나타내었고, 그녀는 조근조근 논리적으로 글을 이끌어가서 내가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러나 글에 대한 욕심도 없고, 나는 글보다는 호작질에 더 관심이 많았으므로 여기저기 신문을 오려붙이고 그림을 그리고  메모한 것들을 덕지덕지 붙여놓길 더 좋아했다.

 

 

 


 

 


 


 

 

이렇게 부산-대구, 혹은 서울-대구를 오가며 쓴 노트는 세권이나 됐는데, 한 번은 서울 갔다오면서 내가 기차 안에 한권을 놓고 내려 그건 잃어버리고 나머지 두권은 각자 한 권씩 나눠가졌다

살면서 만약이란 것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에 내가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쯤 이렇게 긁적거리는 것도 물 건너 간 일이 됐을거고, 내 인생의 스무살에는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하고 궁금해할 때 그저 빈 입맛만 쩝쩝 다시면서 츄잉껌이나 씹어대끼고 있겠지.

 

나는 그녀로 인해 평생을 가지고 놀아도 닳지 않고 신물도 넘어오지 않는 소일거리를 알게 되었으니, 생각하믄 자도가도 벌떡 일어나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판이다.

 

환갑까지 이러구 놀면 ㅎㅎㅎㅎㅎ 좀 지겨워질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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