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행적.

황금횃대 2005. 7. 27. 15:34

못난 여편네가 뭘 그리 궁금하다고 찾아쌌는지 몰것어요

날이 하도 더와서 친정식구들 오라해서 물한리로 피서도 갔다 오고

어제는 오후에 엉겹결에 대구가서 고등학교 친구애들과 저녁모임도 갖었어요

오랜만에 늦은 시간 동성로를 걸어가는데 촌구석하고는 달리 길이 하도 대낮같이 훤해서 정신이 없었세요

동아쇼핑 맞은 편에서 저녁먹고 시내쪽으로 슬슬 걸어왔응께 옛 생각이 지절로 나재요

동아 쇼핑 뒤에는 염매시장이 있어요. 지금도 있겠지요

 

직장 다닐 때 사모님이 꼭 그 시장에서 장을 봐다 먹었어요

일명 고급시장이재요. "전양아...거기 가서 조기 좀 사온나.."사무실 여직원한테 벼라별 심부름을 다 시켰세요. 사장 아들이 상무였는데, 그 집 아이들 출생신고도 내가 다 해줬세요. 출생신고뿐이겠어요? 사모님 위장약 타오는 것도 내가 했구  식당이 없는 회사라서 사모님은 맨날 출근을 하지

사모님 입맛은 여간 까다롭질 않지..재료 가지고 오면 내가 밥 까지 해서 여직원하고 사모님하고

먹었재요. 지금 생각하면 여직원이 뭐 그런거까지 다 하노..싶었지만 그래도 그 때 사람들 밥 해 먹이고 하는게 몸은 고되지만 수양은 많이 됐던게비여 그러니 지금도 그러구 있재요.

 

양담배가 나와서 내국인에게 하루에 한 갑만 판매하던 시절도 있었세요. 지금은 아무데서나 살 수 있지만 그 땐 대구백화점에서 양담배를 팔았는데 그걸 사 오라 하는거라 그래서 택시 타고 백화점 문 열기 전에 가서 줄 서 있다가 양담배 한 갑을 사왔세요. 그 때 양담배 첨 팔 때는 티비에서 취재도 나왔세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양담배 사서 피나...함씨롱 은근히 비꼬는 투로 그런 화면을 잡았겠지요?  줄을 날라르미 서있는 곳을 근접 촬영하는거라 그럼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돌리고 이야단을 해쌌지만 나는 모가지 빳빳하게 세우고 카메라 똑바로 쳐다봤재요. 내가 피우는거 아니니까 고개 숙을 이유가 뭐 있겠세요. 그렇게 양담배 사다 물려 주었는데 퇴직하고 십년이 흐른뒤 안부를 들으니 사장님이 심장병이 걸려서 인공심장을 달고 계신다 허데요.

 

아침 식사로 먹는 빵도 꼭 나더러 사오라 했어요. 시내 가서 양담배 한 갑 사고, 보리식빵 두 봉다리 사가지고 오면 아침 시간이 다 지나가는거라. 시내에서 팔달교까지 왔다갔다하면 그렇채요. 지금 그래라 하면 대번에 때기나발 치고는 내가 여기 사무보러왔지 사장집구석 심부름 하러 왔냐고 한 소리 했을낀데 그 때만 해도 어리석었는기라. 늦게까지 야근을 하면서 일하고 월급받아 책 사보고 엄마한테 생활비 보탤 수 있으니 좀 좋아요? 좋은 줄만 알았지 나를 위해 투자하고 미래에 뭘 할 것인가...하는 머리는 요만침도 안 돌아갔어요. 저그나마 운전이라도 배워놨으면 요새 좀 써묵을낀데 그것도 안 배와놓구..지금 좀 배울라니 고스방이 눙깔을 뒤집으며 못 배우게 하지...남자들 여편네 운전 배우라는 목적이 제 일차로는 술 먹었을 때 대리운전 시키거나 아님 주차 해 놓은 차 가지고 오라고 여편네한테 운전 배우라고 종용을 한다던데, 고스방은 평생을 술 한 모금 안 먹으니 그럴 일이 없어...내가 운전 배울 일은 더욱 요원해지고 마는데.

 

얼마전에도 아버님 편찮으셔서 운전일 안 하실 때, 아버님께 넌즈시...아버님 심심하시면 저한테 운전 좀 알켜주시죠? 했더니 웃으시기만 할 뿐 전혀 그럴 의사가 없으신거 같아..어쩌면 시아버지나 스방이나 똑 같을까 하였재.  늙어서 그거 배울라면 지금도 짱구가 안 돌아가서 미치긋구만..그 땐 더 힘들지 싶은데. 쩝.

 

어이구 이야기가 또 샛길로 샜네

 

조금 더 걸어오니 제일 서적이 있어요

제일 서적 참 자주 갔더랬지요. 저어기 둘도사님도 숼찮히 다녔을껴. 나처럼 서점가서 두 세시간 버티고 책 보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미술 도감책이 있었세요. 열화당 출판사에서 미니사이즈로 화가 개개인의 프로필과 함께 그림 설명하고 그림이 같이 있는 책을 진열해 놓은 칸이 있었어요. 고기 쪼글시고 앉아 화가들 그림책  보니라고 정신없었어요. 플란다즈의 개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좀 더 극적이지만, 그림을 보는 기쁨은 그 주인공이나 나나 다를 바가 없었울껴.

 

제일서적을 지나 조금 더 대구 백화점 방향으로 걸어오면 <미진 분식>이 나오재요. 지나가면서 슬쩍 안의 구조를 봤잔에요. 이십년 전에 미진 분식 그 구조랑 별반 달라진게 읎드만요. 미진 분식 가기 전에 샛길 안에는 탁구장이 있었세요. 그 탁구장에서 두 시간씩 친구랑, 혹은 회사 총각들이랑 땀을 흠뻑 흘리며 탁구 치고, 미진 분식가서 밥 알이 슬슬 흐르는 김밥 한 줄에 우동 한 그륵 시켜서 김밥을 담방담방 적셔 먹으며 꿀맛이였세요. 그 때 운동으로는 내가 유일하게 힘써 하던게 탁구였는데 지금은 하도 안 하니까 몸이 다 굳었겠지요? 탁구는 지금도 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지라. 그건 두시간씩 치래도 얼마든지 할 것 같아요.

 

참, 제일 서적에서 동아양봉원인가? 그쪽 가는 길에 청소년적십자회관 건물이 있었세요. 이층에는 열람실이 있고 아래층에는 매점하고 사무실, 탁구장이 있었어요. 그래서 공고, 상고 학생들이 방과후면 버글버글 끓었세요. 열람실에서 공부도 하고  남학생 구경도 하고, 탁구도 치고 그랬재요. 달리 학생들이 갈 만한 곳이 없었으니 거기 모여서 이야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 때가 참 순수하던 때라 친구들 중에는 결연맺은 대구공고 선배들하고 몰래몰래 연애도 했더랬어요. 그런 이야기 듣는 것도 재미있고. 나는 물론 연애 이런거 못해봤시요. 때국물이 줄줄 흐르는데다가 촌티가 들들나니까 남학생이 좋아하덜 않았지요. 사는게 고등학교 때 참 궁색했세요.

 

그렇게 힘들게 살다가 취직해서 월급 쪼매받아 십일조처럼 10%떼서 책 사보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책을 들여다보면 글자가 달다라는 느낌이 그땐 통했세요. 김주영씨 소설 <객주>가 나올 땐 정말 내가 봇짐장수 천봉삼의 떨거지를 따라다니는 보부상 여편네 같았어요. 얼마나 실감이 나고 글줄이 감칠맛 나던지.. 그 때 읽으면서 나도 함 써봐야지..하고 마음을 먹었더면 나는 또 다른 길을 갔을지도 몰래요. 그렇지만 그 땐 부지런히 읽고 글줄이 달고 환한 것만 좋아하고 말았재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참 욕심이 없었더랬어요. 무엇이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새로운 지평을 열라고 쪼매 아둥바둥했으면 좋았을껄...그럼 성격도 좀 고쳐졌을게구...그럼 더 좋았을껄..하는 마음이 아쉽게 들긴 들어요. 이젠 뭐 하도 고착화된 성격이라 고치기 힘드러요.

 

밤길을 걸어서 옵니다.

친구들이랑 저녁먹으며 돼지고기 수육을 시켰는데, 식당 이름이 <티파니 레스토랑>인데 속메뉴는 순전 한정식이라. 깔금하게 술 한잔 할려면 수육시키면 한 상 차려 나오고, 밥 시키면 밥 반찬에 또 된장찌개 나오고...다른 애들은 간만이라며 맥주를 마시는데 나는 한 잔을 먹어도 쇠주라. 소주 한 병 시켜놓고는 혼자 어지가히 다 따라 묵었세요. 차 가지고 온 애들은 맥주 한 잔에 땡이지..소주는 안 먹을라하지..그래도 먹들 못해도 따뤄주는 메너는 끝내주는 친구가 있어서 부지런히 받아 마셨세요. 그대도 밥 먹고 마셔서 그런지 그렇게 취하던않은데 얼굴은 화악 달아올르고 속이 뜨거워졌어요. 어흥흥...이런날 애인이 옆에 있음 바로 사고치는데..아쉽게 애인은 없구 여자친구들 밖에 없었세요. 친구들 배웅해 보내고 그렇게 길을 걸어서 갑니다.

 

아! 저 대책없는 속엣것의 뜨거운 맛!

그걸 주저 앉히느라 나는 몇 번 헛새김질을 합니다. 뜨거운 것들은 불인냥 화염인냥 목구멍을 데우고 얼굴에 열꽃을 피우고 가슴을 답답하게 하며 잦아들재요. 그것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보이는 풍경은 지난 날의 열정 속으로 나를 뜬금없이 데려다 놓습니다. 늦은 밤에도 대구 시민들은 활기차게 길을 따라 흐릅니다. 나는 홀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열정을 추스리느라 안간힘을 씁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고, 어금니를 앙 다뭅니다.

 

열시 반,

상행 기차에 몸을 눕히고는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어둠에 눈을 빨대처럼 꽂고는 내 안의 뜨거운 것을 뽑아냅니다.  화염은 몸 밖으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고 내 속에서 몇 번이나 소용돌이를 치며 맴돌다가 겨우겨우 새어나갑니다. 몸이 축 늘어지지요

 

집에 와서 대문 잠그고 들어서니 일상의 인물들이 가로 왈, 세로 왈 구석구석 제 자리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고요를 살금살금 딛이고 들어와 컴을 켜니 못난 여편네가 궁금해서 다들 들여다 보고 가셨네요. 특히 리차드님... 내가 뭐라 뜨거운 것을 한 마디 쓸래니 들어오십디다. 목이 메여 하마트면 나는 당신한테 그렁그렁한 눈으로 손 내밀뻔했지 모야요 ^^

 

 

그냥그냥 숨소리 안 내도 촌 여편네는 잘 살고 있는갑다 녀기소서...

 

 

 

 

 

 

'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침.  (0) 2005.07.31
블로그에 손님들은 들락거리는데...  (0) 2005.07.30
따라쟁이들..  (0) 2005.07.21
향교로 소풍가자  (0) 2005.07.20
날도 더운데 더 더운 이야기...  (0) 2005.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