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블로그에 손님들은 들락거리는데...

황금횃대 2005. 7. 30. 12:43

어제 오후, 아이들은 세시 기차를 타고 외갓집이 있는 대구로 갔다.

오전에 덜 더울 때 가라고 하니 저희 둘만 가는게 좀 그랬는지 엄마 안 가면 안 간다고 버팅기다가  점심 때쯤 우편물이 왔는데 딸아이 성적표가 있다.

내신 등급이네 뭐네...해도 내 딸아이 실력은 내가 가장 잘 알재요. 그래도 막상 점수 확인하니 어깨에 힘이 쫘악 빠지는거라..그 성적표 보고 양치질을 하는데 왜그리 목이 메이고 눈물이 나는지.. 자슥놈들이 공부를 좀 삐까번쩍하게 잘 해주면 고생하는 아바이 보람도 있으련만 나는 그렇다 치고라도 제 에비가 문득 불쌍해지는 것이다.

 

하는 말로는 고스방도 공부를 잘 했는데 형편상 대학을 못갔으니, 그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짠하게 돌처럼 박혀있어 아이들에게 그런 내색을 비치기도 하는데, 그러니 에비가 못한 것 너희들은 걱정않고 시켜주겠으니 공부만 잘 하란말야 해도 공부 그게 또 맘 먹은대로 잘 되냔 말이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하고 말하는 놈은 모다 재수없는 놈이라고...대놓고 말하는 그들의 농담을 들으면서, 공부든 일이든 쉬운게 없단다 하고 말할려니 잔소리 같아 고만 입 다물고 만다.

그래도 미안은 한지 보던 티비를 끄고 책상 앞에 앉아 수학문제를 푼다고 우그리고 앉아 있다. 그 꼴도 또한 보기 좋은 것은 아니라. 나중에 살아보면 공부가 행복지수를 끌어 올려주는 것은 아니란걸 알게 되지만, 그래도 학생이니 좀 잘 하면 좀 좋은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성적표를 고스방에게 보여주면 그 실망감과 분노를 아이들이 고스란히 받을 걸 생각하니 걱정도 되는지라...내가 너희들 가고 없을 때 아빠한테 성적표 보여주고 내가 대신 혼날께...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러고 아이들은 대구행 짐보따리를 싸서 갔다.

속마음이야 나도 가고 싶지. 그런데도 못 갔다. 며칠 전 대구 오후에 다녀온 것도 그렇고, 물한리에서 친정식구들이랑 하룻밤 자고 왔으니 또 가겠단 말을 못하는 것이다. 알아서 수구리해야 하는 심정.

 

어릴 때 방학이 되면 고모집으로 갔다.

박꽃이 피고 도라지꽃이 제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팡팡 웃어주던 그 동네로.

보리밥 한 그릇씩 먹고는 소를 몰고 동네산에 소먹이로 가면 종일 소나무 그늘 아래 뽕잎을 따다가 모자를 만들고 산대를 꺾어다 흩어놓고 그거 떼어 따먹는 놀이를 하였다.

점심 먹으러 와서 자주감자 한방태이 담아서 냇물에 가서 박박 긁어 와 삶아 먹었다.

감자껍질을 놋숟가락 닳은 것으로 벗겨내면 감자 전분물이 얼굴에 튀어서 하얀 주근깨가 박혔다.

감자를 먹고 우물 물 한 바가지 퍼서 씨원하게 마시고 나면 그것이 요기가 되었다.

 

들에 일 하러 나간 고모와 고모부가 골을 쪄서 가져오면 저녁에는 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고 골을 짜갰다. 한 사람은 칼로 골껍질을 일정한 넓이로 뜯어내고, 맞은 편에 앉은 우리는 결대로 뜯어져나오는 골을 잡아 옆에다 하나하나 챙겨 놓았다. 모깃불이 매캐하게 타오르고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밤에는 자주 별똥별이 꼬리를 길게 늘어 뜨리고 떨어졌다.

 

아침이 되고 햇살이 산천에 퍼지면 신작로에 골을 널었다. 왕골은 푸른 빛을 머금고 껍질에는 윤기까지 담뿍 물면서 말랐다. 초석자리를 짤 때는 염색을 하지 않는 푸른색빛이 도는 왕골로 자리를 짰고, 꽃자리를 짤 때는 붉은색, 노란색, 남색 물을 들인 왕골을 사이사이에 끼워 무늬를 만들며 짰다.

 

늦은밤까지 고모와 고모의 시집 안 간 시누이고모가 자리를 짰다.

긴 대나무 작대기에 왕골 끝을 꼬부려 꽂고는 씨줄 사이에 왕골을 길게 찔러 넣어주면 자리틀에 있는 바디로 꼭꼭 눌러서 자리를 짜 나간다. 왕골 하나의 굵기가 1mm도 안되는데 그런 것을 차곡차곡 쌓아서 사람 하나 키크기 만큼 짤려면 얼마나 틈틈이 자리틀에 매달려야 하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게 자리 한 장, 두 장, 석 장, 꽃자리까지 구색맞춰 두어장 완성하면 그걸 팔러 장에 갔다. 농촌 부업 거리가 없었으니 자리 댓장 가져가서 팔고 오는 날은 주머니 사정도 넉넉해 우리는 고모가 장에서 돌아오는 동네 어귀에 일찌감치 마중을 나가기도 했다.

 

동네 초입, 느티나무 아래 맴맴 맴돌며 시간을 보내다가 머리에 이고지고 먼지를 일으키며 걸어 오는 고모의 마른 몸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남동생이 있으니 친정에는 나를 고모라고 부르는 조카들이 몇 명있다. 방학이면 이곳에 와서 신나게 놀다가면 좋으련만 우리집에는 시부모님 계시고 천방지축 떠들고 지내다 거기 가면 부산스러워 어른들 싫어한다며 보내지를 않으니 몸은 편하고 좋다마는 옛날 생각이 뷸쑥 떠오르면 괜히 내가 심술궂어진다.

 

그렇게 왕골자리 팔아가며 아이들을 키우고, 친정조카들 거둬 먹이던 고모는 살기 좋은 이 좋은 시절을 왜 밀쳐내고 먼저 가셨는지..

 

 

 

블로그에 손님들은 들락거리는데 읽을게 없어...참 무안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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