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저녁

황금횃대 2005. 12. 26. 20:46

저녁밥은 잘 먹었어요

잘 먹었다는게 뭐 반찬이 많고 요란한게 아니구

배가 딱 고플 때, 김치 처억 걸쳐서 개운하게 먹었다는 얘깁니다

어제는 동네 총회가 있었어요

영동군 황간면 마산리, 그것도 웃마산리 회의라요

아침에 일어나 눈 비비고 나오니

이장님이 벌써 김연자 테이프를 틀어놨어요

(아참, 어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차 쉴 때 저눔의 김연자 질렸다고 테잎 하나 새로 사온다는 것이 매번 잊었네요)

집집마다 매달린 스피커에서 김연자의 노래가 쏟아져나오면

아이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이불을 덮어쓰고 돌아눕습니다

그러나 뭐 소리가 어디 이불 속으로 안 파고들어가간?

 

아,아, 마이크 시헙중입니다

요새 이런 말로 시작하는 이장님 없습니다

마이크 성능도 좋을 뿐더러 집집마다 달린 스피커도 삐이삑 삑사리 한 번 않내고

이장님의 원초적 목소리를 다 방송해 줍니다.

 

"동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05년도 동네 총회를 오늘 마을회관에서 가지고자 하오니

동민 여러분께서는 오전 10시까지 회관으로 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울러 총회를 가진 후

마산리 위친계도 같이 할 예정이오니 위친계원들께서도 빠짐없이 참석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시한번..."

 

이장님의 도돌이표 안내 방송이 끝나고 나면 다시 김연자가 막후 출연을 해서 간드러지게

노래 한 곡 땡기고 들어갑니다.

김연자는 출연료도 받지 않고 자주 우리 동네 공연을 나옵니다 그려.

 

9시가 좀 넘어 회관으로 갔더래요

이장님 사모님이 화덕 속에 재를 털어 내고 수돗물 얼은 것을 녹이기 위해 가마솥에 물을

끓입니다.

소내장국, 선지국, 동태국에 오징어국...해마다 돌아가며 이것저것 끓여내는데 어떤 해는 맛이

있다하고 어떤 해는 맛대가리 하나도 없다는 소릴 듣곤 합니다. 그래서 올해는 동네 돈도 얼마

없어서 돼지고기 김치찌개로 낙착을 봤어요

 

이장님댁의 김치가 먹다 부은 것까지 한 통 들려서 나오고, 돼지고기 앞다리살 썰은게 들어가고, 두부 한 판에 비싼 대파 줄기가 뚝,뚝, 또개져 들어갑니다. 양파도 썰어 넣어주는 쎈스!

 

미리 쌀을 씻어 전기 밥솥에 않혀 놓았다가 시간 맞춰 전기 코드를 꽂으니 많이 하는 밥인데도

고슬고스 밥 알이 낱낱이 도는게 희안하게 잘 됐습니다

콩나무 무치고, 민정이 할머니가 밥상에 반찬이 너무 없다며 쪼차 가시더니 직접 담은 무장아찌를 두어개 가져오셔서 들기름에 깨소금 듬뿍 넣어 채썰어 무쳐 내십니다.

 

동네 재정을 이야기하고, 올해 우리 동네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데...이장님의 보고가 있는 사이 바깥 아궁이에서는 김치찌개가 끓어 오르고, 고슬고슬한 밥을 푸는 손길이 바쁩니다

 

상이 놓아지고 남자들에게는 각자 밥에 국이 돌아가고 할머니들은 고봉 모둠밥에 각자  김치찌개가 놓여집니다. 맛있게 드십니다.

 

아침부터 수도물 녹이고 밥하고 설거지 하던 사람들이 밥도 젤 나중에 먹어요

소주도 한 잔씩 권합니다.

"부녀회장이 엉가이 이뿌네"

아랫마을 할머니들이 올라와 앞치마 두르고 동당거리는 나를 보고 이뿌다 하네요 히~~

 

동네총회가 끝나고 입가심으로 귤을 까 먹으며 또 위친계를 해요

위친계의 재정상태가 프린트 되어 앞앞이 놓여지고, 해마다 논의 됐던 일에 대해 또 이야기해요

 

초상이 나면 맨날 나오는 사람은 꼭 나오는데 안 나오는 사람은 안 나온다

기실 부모님이 다 안계시면 계를 하기 힘든데 그렇다고 탈퇴를 시킬수도 없고....와글와글..

의견이 분분하고 원칙대로 벌금을 딱, 딱, 받아야재, 아이고 그래도 고향지키고 사는 사람이

쬐금 양보해야재 객지 살면 갑자기 생기는 초상에 다 참석을 할 수 있깐?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갑니다. 결국 동네 있는 사람들이 조금 수고 하기로 하고... 위친계도 끝이 납니다

 

그쯤 되면 수미아빠와 박장군 아저씨, 위친계장님이며 몇 몇분들이 술이 조금 돌아요

주머니에서 수고한 부녀회 아줌마들에게 이만원 혹은 삼만원의 찬조금이 전해지고 농협에서

소주 한 박스 더 날라져옵니다.

 

남은 두부를 뜨거운 물에 튀겨서 술안주로 내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날이 저물어요

비틀비틀 수미 아빠가 아줌마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집에 가야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계장님이 자동차에 시동을 걸면 박장군 아저씨가 손을 흔들며 옛날 똥장군 두 통을 거뜬이 지게에 져 올렸다는 몸을 끌며 집으로 돌아가십니다

 

촌구석에는 해가 쉬이 떨어져 기차가 돌아져 나오는 모퉁이에는 어둔 해그늘이 같이 따라와요

회관 방바닥까지 쓸고 난 뒤 후다닥 뛰어서 집으로 들어오면 하...종일 가만히 있던 집 안의 온기가 날 반기며 와라락 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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