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신부님 편지

황금횃대 2004. 4. 13. 17:00
여름 장마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비 피해는 없으셨는지요
저도 농촌 태생이라 어릴적 비 오던 때 생각이
납니다. 어린 나와 누님들이 곤히 잠들어 있는
새벽녘에도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셔서 누런 비옷을
입고 논으로 나가셨지요. 오른손에는 삽 한자루가
들려 있었구요. 행여나 애써 농사지어놓은 논의
벼포기가 쓰러질세라 논둑이 갑작스레 내린 비로 넘칠
세라 아버지는 아마 밤새 한 잠 못 주무시고 노심초사
하셨을겝니다

장대비 내리는 속도가 줄어들고 대낮이 밝아옵니다
그러면 동네 어른들 아이들 할 것없이 모두 투망과
낚시대를 움켜 쥐고 모두들 남한강가로 나아갑니다
물고기떼가 엄청나게 아래로 떠 내려오거든요.
옛날에 나막신 장수 아들과 소금장수 아들 둔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고 했던가요. 비가 오면 어머니는 소금 장수 아들
걱정하고 날이 개면 나막신 장수 아들 걱정했다고
하지요
다 하늘이 하는 일이라 날씨는 인력으론 어쩔 수 없지
만 이 장마비에 서민들 살림살이에 큰 피해가 없기
를 마음으로 빌어봅니다.
그래도 내리는 비는 세파에 지친 나그네들을 잠시나마
존재의 고향으로 바래다 주는 오묘함도
가지고 있네요. 그 미 맞고 밝게 맑게 피어 난 개망초꽃이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2003. 7. 9



붉은 목단꽃은 오월에 이미 제 목숨을 떨구었는데
신부님이 그려보내주신 목단꽃의 붉은 낯빛은 어제도 그제도
변함없이 붉고 건강합니다
시퍼렇게 떠 받치는 꽃이파리도 그렇고요

장마비 내리면 머리 속에는 맨날 만화 풍경 한 컷 떠오르지요
루핑을 얹은 판자집 지붕에서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들
방 안에는 세수대야, 양재기 받쳐놓고 물이 튀지 않는 방구석에
무릎세우고 오동그리고 앉아 그 비를 바라보는 하염없는 풍경
물방울은 작은 양재기 속에 고인 물에도 똑,똑, 파문이 일어
제 존재의 떨어지는 반경을 온 몸으로 그려냅니다.

탱자나무 울타리로 매서운 꽃샘바람이 부엌으로 그대로 들이치던 날
엄마는 둘째 동생을 낳았더랬지요
음력이라 삼월이래도 그 때는 왜 그리 추웠던지요
다섯살 나는 쪽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엄마의 고통을 들었겟지요
소리 내지르는 크기야 이젠 기억도 없지만, 부산히 움직이던 앞집
할머니와 아줌마들의 손놀림은 꼭 본 듯 눈 앞에 어른거립니다
다섯살때의 기억이라 믿을만 하던가요? 하고 물으신다면
아, 얼마든지 믿을만 합니다 하고 대답하지요

도랑 길가 집이라 이맘때쯤이면 장마가 와서 시뻘건 흙탕물에 돼지대가리가 물 속에서 올라왔다 가라앉았다 하면 떠내려갔어요
동네 사람들 모두 수양버들 나무아래 모여서 돼지 떠내려간다고 소릴지르며 손가락으로 돼지를 가르키면, 돼지는 마치 쇼를 하듯이 자맥질을 하면서 빠른 물살에 떠내려갔지요
호박도 그렇게 물 위에서 원맨쇼를 하고, 커다란 나무등걸도 나름대로의 장기를 보여주며 물살을 타고 내려갔습니다
무엇이든 재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져 우린 붉은 흙탕물이 흘러가는 쪽으로 주인공의 모습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길을 따라가다 또 다른 함성에 새로운 주인공들을 방둑에서 찾아내고 환호를 보냈답니다
구경이 귀한 시절, 홍수가 나서 물 구경하는 것도 큰 구경거리였지요

개천물이 맑아지면 햇빛도 뜨거워져 맨몸을 구워대며 돌멩이 위에다 고무신을 엎어 놓고 이런 노래도 불렀습니다

"빼빼 말라라 아지야아지야 말라라"
혹은,
"비야비야 오너라 내일모레 떡주께"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면 물 속에서 나와 말려놓은 고무신을 발가락에 끼고는 집으로 왔었지요
보리밥 한 그릇 먹고는 숟가락 든 채로 잠이들던, 놀기만 해도 고단하던 시절.


텅빈 겨울 들판에는 까마귀가 떼서리로 나르고, 그렇게 불길한 울음을 울어갔어도 오빠생각 노래를 배우느라 뜸부기만 찾았었지요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햇빛에 말리던 고무신의 등짝만큼이나 슬펐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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