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달성군 다사면 죽곡리
낙동강을 건너지르는 강창교를 지나 기역자 모양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러러뵈는 산 아래 외갓집 동네가 있었다.
동네 들어가는 초입부터 동네가 산 밑으로 길다랗게 자리를 잡아, 일찌감치 낙동강 물을 끌어 당겨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수리조합이 만들어져 들판을 가로지르는 농수로겸 작은 도랑에는 맑은 물이 사시사철 철철 흘러내렸다.
그 도랑에는 조개가 많아 막내 외삼촌하고 둘이서 쭈그러진 주전자를 들고 조개 주으러 자주 갔는데, 나보다 한 살 많은 막내 외삼촌은 일년 일찍 취학한 나와 학년이 같아서 그냥 동무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삼촌 같지 않는 삼촌에게 나는 일찌감치 '삼촌'이란 칭호를 눈 딱감고 발성을 해 버렸고, 까짓것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삼촌은 매번 소죽 끓이는 아궁이에 고구마를 구워서 헌책을 찢어 둘둘 말아 가지고 왔고, 여름이면 소를 끌고 뒷 산에 올라갔다, 산 맨꼭대기에 서면 성서가 훤히 내려다뵈는 펑퍼짐한 초지가 자리잡고 있어, 거기다 소를 풀어 놓고 우린 뽕나무 뒤에도 숨고, 떡갈나무 뒤에도 숨으며 해가 껄떡 넘어 갈 때까지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다.
소를 먹이러 갈 때는 방학 때라, 아침만 먹으면 동네의 또래 머슴애들이나 기집애들이 집집이 소를 몰고 뒷고샅 좁은 길을 밟아 산으로 산으로 긴 행렬을 만들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그즈음 방학 숙제라는게 잔디씨를 모아 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삼촌과 나는 어떨 때는 한 홉이란 잔디씨 모으는 숙제를 하느라 잔디에 엎디러져 자주색으로 올라오는 잔디씨를 훑어 박카스 병에 조르륵 부어 담았던 기억도 난다.
산 꼭대기 바위틈 어디선가 맑은 물이 나와, 우리는 따로 물을 가져가지 않고 뽕이파리를 따다가 그 물을 떠 마셨다. 거기서 나는 삼촌에게 뱀알이야기도 듣고 참나무에서 귀 따갑게 울어대던 매미는 굼벵이가 칠년 동안 땅 속에서 도를 닦다가 나와 저리 울고 간다는 전설도 들었다.
소 풀어놓고 솔 숲에 들어가 학교 놀이도 하고, 산대를 꺾어 확 섞어 놓고는 가느다란 산대로 흩어진 산대를 흔들림없이 떼어내는 놀이도 하였는데 그러다 소나기를 만나면 진지하던 산대도 팽개치고 소 찾아 나서기 바빴다. 삼촌은 심심하면 뽕잎 넓은 것을 한아름 따다가 뽕잎 대궁으로 뽕잎을 이어 붙여 삿갓같은 이파리 모자도 만들어 주었다.
하루종일 같이 놀다가 저녁에 소를 몰고 내려와 저녁을 먹고, 마당에 모깃불을 놓고는 대나무 평상에 앉아 참외와 수박을 먹었다.
가끔 맑고 검은 하늘을 가로지르며 별똥별이 떨어져, 수박을 베어 문 입을 헤 벌리며 저 별똥별이 어디쯤 떨어져 굉장한 빛가루를 풀어먹이고 있을까 바라보았다.
불티가 나르는 주위에는 할머니의 부채질이 우리의 다리를 스치듯 지나가 어딘가 붙어 피를 뽑아내는 모기가 깜짝 놀라 달아나게 손끝을 놀리셨다.
논 농사는 물론이고, 마늘 농사를 많이 지어 마늘을 캐서 외양간 외벽에 수복히 달아 놓은 것을 보고 외할머니집은 참 부자구나..어린마음에 그리 생각을 햇었다
외양간 옆에 디딜방아가 있어, 디딜방아 발 딛이는 윗부분 시렁에는 손을 끼워 매달릴 수 잇는 밧줄 고리가 있어 작은 키를 어거지로 늘려 그 줄을 꼬옥 잡고 디딜방아를 찧은 기억도 있다
디딜방아 머리가 번쩍 들리면 할머니는 잽싸게 짚몽당빗자루로 돌확 밖으로 튀어나온 쌀가루를 확 쪽으로 쓸어 넣으셨다
절구공이가 손을 찧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여지없이 깔아뭉개며 할머니 손가락은 하얗게 쌀가루가 도탑게 달라 붙으며 쌀가루는 곱게 곱게 빻아져갔다.
쿵, 쿵,방아소리처럼 기억은 어린 기집애의 가슴에 어떤 그리움의 빛깔로 화인처럼 찍혀질 지 디딜방아는 생각도 못하였겠지만, 기십년이 지난 지금도 디딜방아 서까래에 쳐졌던 거미줄의 모양과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던 방앳줄은 생각만하면 그들은 내 옆에 앉아, 나를 그 외양간 옆 디딜방아 풍경 앞에 서성거리게 한다.
외할머니는 진짜 외할머니가 아니고, 치자면 울 엄마의 작은어머니시다.
엄마의 엄마, 즉 나의 진짜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는 작은엄마 손에서 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엄마의 작은엄마를 외할머니로 알고 자랐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외갓집에는 이모도 있었다
날마다 이모들은 홀치기를 하였다
달그닥 달그닥 홀치기 실꾸리가 홀치기 바늘에 부딪는 소리가 늦은밤까지 났다.
김세레나의 노래소리가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나오고, 이모와 이모 친구들은 돌레돌레 둘러 앉아 홀치기장단과 김세레나의 콧소리를 섞어가며 점점이 박힌 홀치기 문양을 홈씬 비단실로 옭아매었다.
스물 아니면 스물 두엇, 처녀들의 청량한 목소리는 창호지의 숨구멍을 통과하여 스멀스멀 흙담을 넘고 고샅에 머문 달빛을 밟아 하늘로 밤하늘로 올라갔다.
허이고 팔아퍼..나중에 또 쓰던동..
추억은 쉬이 없어지지 않으니.
상순
낙동강을 건너지르는 강창교를 지나 기역자 모양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러러뵈는 산 아래 외갓집 동네가 있었다.
동네 들어가는 초입부터 동네가 산 밑으로 길다랗게 자리를 잡아, 일찌감치 낙동강 물을 끌어 당겨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수리조합이 만들어져 들판을 가로지르는 농수로겸 작은 도랑에는 맑은 물이 사시사철 철철 흘러내렸다.
그 도랑에는 조개가 많아 막내 외삼촌하고 둘이서 쭈그러진 주전자를 들고 조개 주으러 자주 갔는데, 나보다 한 살 많은 막내 외삼촌은 일년 일찍 취학한 나와 학년이 같아서 그냥 동무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삼촌 같지 않는 삼촌에게 나는 일찌감치 '삼촌'이란 칭호를 눈 딱감고 발성을 해 버렸고, 까짓것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삼촌은 매번 소죽 끓이는 아궁이에 고구마를 구워서 헌책을 찢어 둘둘 말아 가지고 왔고, 여름이면 소를 끌고 뒷 산에 올라갔다, 산 맨꼭대기에 서면 성서가 훤히 내려다뵈는 펑퍼짐한 초지가 자리잡고 있어, 거기다 소를 풀어 놓고 우린 뽕나무 뒤에도 숨고, 떡갈나무 뒤에도 숨으며 해가 껄떡 넘어 갈 때까지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다.
소를 먹이러 갈 때는 방학 때라, 아침만 먹으면 동네의 또래 머슴애들이나 기집애들이 집집이 소를 몰고 뒷고샅 좁은 길을 밟아 산으로 산으로 긴 행렬을 만들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그즈음 방학 숙제라는게 잔디씨를 모아 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삼촌과 나는 어떨 때는 한 홉이란 잔디씨 모으는 숙제를 하느라 잔디에 엎디러져 자주색으로 올라오는 잔디씨를 훑어 박카스 병에 조르륵 부어 담았던 기억도 난다.
산 꼭대기 바위틈 어디선가 맑은 물이 나와, 우리는 따로 물을 가져가지 않고 뽕이파리를 따다가 그 물을 떠 마셨다. 거기서 나는 삼촌에게 뱀알이야기도 듣고 참나무에서 귀 따갑게 울어대던 매미는 굼벵이가 칠년 동안 땅 속에서 도를 닦다가 나와 저리 울고 간다는 전설도 들었다.
소 풀어놓고 솔 숲에 들어가 학교 놀이도 하고, 산대를 꺾어 확 섞어 놓고는 가느다란 산대로 흩어진 산대를 흔들림없이 떼어내는 놀이도 하였는데 그러다 소나기를 만나면 진지하던 산대도 팽개치고 소 찾아 나서기 바빴다. 삼촌은 심심하면 뽕잎 넓은 것을 한아름 따다가 뽕잎 대궁으로 뽕잎을 이어 붙여 삿갓같은 이파리 모자도 만들어 주었다.
하루종일 같이 놀다가 저녁에 소를 몰고 내려와 저녁을 먹고, 마당에 모깃불을 놓고는 대나무 평상에 앉아 참외와 수박을 먹었다.
가끔 맑고 검은 하늘을 가로지르며 별똥별이 떨어져, 수박을 베어 문 입을 헤 벌리며 저 별똥별이 어디쯤 떨어져 굉장한 빛가루를 풀어먹이고 있을까 바라보았다.
불티가 나르는 주위에는 할머니의 부채질이 우리의 다리를 스치듯 지나가 어딘가 붙어 피를 뽑아내는 모기가 깜짝 놀라 달아나게 손끝을 놀리셨다.
논 농사는 물론이고, 마늘 농사를 많이 지어 마늘을 캐서 외양간 외벽에 수복히 달아 놓은 것을 보고 외할머니집은 참 부자구나..어린마음에 그리 생각을 햇었다
외양간 옆에 디딜방아가 있어, 디딜방아 발 딛이는 윗부분 시렁에는 손을 끼워 매달릴 수 잇는 밧줄 고리가 있어 작은 키를 어거지로 늘려 그 줄을 꼬옥 잡고 디딜방아를 찧은 기억도 있다
디딜방아 머리가 번쩍 들리면 할머니는 잽싸게 짚몽당빗자루로 돌확 밖으로 튀어나온 쌀가루를 확 쪽으로 쓸어 넣으셨다
절구공이가 손을 찧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여지없이 깔아뭉개며 할머니 손가락은 하얗게 쌀가루가 도탑게 달라 붙으며 쌀가루는 곱게 곱게 빻아져갔다.
쿵, 쿵,방아소리처럼 기억은 어린 기집애의 가슴에 어떤 그리움의 빛깔로 화인처럼 찍혀질 지 디딜방아는 생각도 못하였겠지만, 기십년이 지난 지금도 디딜방아 서까래에 쳐졌던 거미줄의 모양과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던 방앳줄은 생각만하면 그들은 내 옆에 앉아, 나를 그 외양간 옆 디딜방아 풍경 앞에 서성거리게 한다.
외할머니는 진짜 외할머니가 아니고, 치자면 울 엄마의 작은어머니시다.
엄마의 엄마, 즉 나의 진짜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는 작은엄마 손에서 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엄마의 작은엄마를 외할머니로 알고 자랐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외갓집에는 이모도 있었다
날마다 이모들은 홀치기를 하였다
달그닥 달그닥 홀치기 실꾸리가 홀치기 바늘에 부딪는 소리가 늦은밤까지 났다.
김세레나의 노래소리가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나오고, 이모와 이모 친구들은 돌레돌레 둘러 앉아 홀치기장단과 김세레나의 콧소리를 섞어가며 점점이 박힌 홀치기 문양을 홈씬 비단실로 옭아매었다.
스물 아니면 스물 두엇, 처녀들의 청량한 목소리는 창호지의 숨구멍을 통과하여 스멀스멀 흙담을 넘고 고샅에 머문 달빛을 밟아 하늘로 밤하늘로 올라갔다.
허이고 팔아퍼..나중에 또 쓰던동..
추억은 쉬이 없어지지 않으니.
상순
'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의 넓이 (0) | 2004.04.19 |
---|---|
슬슬 부딪혀 오는 것 (0) | 2004.04.19 |
곰탱이 서방 보단 여우 서방이 낫다 (0) | 2004.04.13 |
신부님 편지 (0) | 2004.04.13 |
방구 질나자 보리양식 떨어진다더니 (0) | 2004.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