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촌지 없이 자슥놈들 키우기

황금횃대 2004. 4. 19. 22:57
바깥으로 눈 돌리면 바야흐로 푸른잎으로 덮여가는 산천의 모양을 보더라도 틀림없이 월력은 오월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오월이 오면 산천이 주는 싱그러움은 마음 가득 신록의 환함을 가져다 주지만, 또 한켠 오월이 온다는 부담감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오월은 음력으로 사월! 그 서른날 남짓한 한 달의 구성 속에는 크고 작은 행사가 빽빽히 들어 앉아, 생일이며 제사며, 거기다 인천까지 날밤을 새며 지내고 와야할 시아즈버님 제사까지 생각한다면 아직 날도 닥치기 전인데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거기에다 오월은 아이들 소풍이 있고, 큰 딸은 수학여행이 끼였나 하면,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다닥다닥 포진하고 있어 그야말로 지갑의 지퍼를 잠글 새도 없이 그냥 헤벌레 열어놓고 살아야 하는 계절이 온 것이다.

해마다 근심인 오월이 돌아와도 해마다 그럭저럭 큰 빚이 지지 않고 사는 걸 보면 마음의 근심이 금전의 근심보다 훨 큰 것 같다는 느낌이다.
친정에 올케는 작년에 큰 딸을 학교에 보냈는데, 올해는 이학년이 되었다. 친정어머니 생신이 오월 오일이라 그즈음 친정에 들르면, 예전에는 하지 않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선생님 접대 문제.

아이를 키워 본 엄마라면 누구라도 이 문제에서 맘 편히 자유로운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더군다나 에미 된 입장이라면.
오월이 되면, 아이들 날은 아무 것도 아니라 그저 스승의 날에 무슨 선물을 아이 손에 들려보내야 할지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듣는다.

기실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은 삼백예순다섯날을 다 마음에 깊이 새겨도 모자랄 판국이다. 방학 동안 아이 둘을 데리고 있어보라. 그야말로 이마빡에 내 천자(川) 떠날 날이 없고, 목이 칼칼하도록 고함을 질러대도 짜슥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실실 농이나 쳐대니 팔딱팔딱 뛰는 내 심장과 목구멍이 불쌍할 따름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선생님이 아이들을 통솔하여 그 어렵다는 공부와 인간교육까지 착실히 시켜주시니 그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 오월 들어 오기 전부터 엄마들이 고민을 해야함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고마움을 표시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손 쉬운게 물질이라.
꽃 한송이라도 챙겨서 들고 가야 하는 것도 기실 까뒤집어 보면 마음으로 고마와하는 것은 넘의 눈에 띄지도 않을 뿐더러 아이들이 그걸 인정도 안해 준다는 것이다.
커다란 꽃바구니에 휘황한 리본을 곁들여, 컴퓨터가 좌르르 뽑아낸 글씨로 "선생님 고맙습니다"라는 잉크자욱이나 찍어야 넘들 눈에도 번듯하고 아이들 손도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는 엄마들이 늘어 나기 때문이다

가까운 곳에 꽃집하는 친구가 있어, 거기에 머물며 여려 해를 겪어 본 결과 선생님께 육필 편지를 써 고맙다고 몇 만원짜리의 꽃바구니에 정성껏 끼워 보내는 엄마가 아주 없다고는 말 못하지만 별로 눈에 띄지를 않았다.
거개가 전화 한 통으로 스승의 날에 몇 학년 몇 반 교실로 꽃바구니 하나 넣어 주세요 가격은....
실정이 이렇다 보니, 꽃바구니는 고민 하지 않고 생색낼 수 있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 되었고, 거기다 며칠 전 부터 고민한다는 엄마들의 물품 목록을 들어보면, 받아서 포장지 뜯는 기쁨 뿐일 거라는 느낌이 드는 선물로 오십보백보의 테두리를 벗어 나지 못한다.

그마저의 신경씀도 싫다는 사람들은 오만원이나 십만원짜리 상품권을 끊어서 건네는 모양이다.
받으시는 선생님께서는 혹간, 이런 선물 절대로 받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되돌려 보내시는 분도 계시지만, 대개는 그냥 접수가 된다.

항간에는 오즉 선생님의 존경을 받지 못하면 이렇게 날을 정해서 일괄적으로 하루만이라도 선생님 생각하세요 하는 기맥힌 이벤트를 준비했을까 싶지만 그 하루 조차도 엄마들은 이렇게 버거워하니 참말로 본질은 어디로 휘발하고 스승의 날이 골치아픈 날로 받아 들여지나 의아할 따름이다.

나는 이제 아이들이 어지간히 커서 그런데 신경을 쓰지 않지만, 아이가 어릴 때는 적잖히 신경이 쓰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서 그나마의 신경도 아주 쓰지 않으니 나같은 엄마가 하늘아래 몇 되지 않으리라.
저학년 때는 자그마한 액자를 사다가 그림을 그려 넣고 시를 써서 선생님께 보내드리고, 고학년이 되어서는 그냥 오월달 달력 한 장 만들어서 액자에 넣어서 보냈다.

그 액자가 일회성인지, 아니면 달력의 수명이 다 한 다음에 다른 용도로 쓰여 졌는지는 내 알바가 아니나, 가끔 생각나면 또 한 달분의 달력을 만들어 아이 손에 들려 보낸다. 늘 고맙다는 상투성 인사말을 적어 보내면서. ㅎㅎㅎ
그러나 결단코 돈을 봉투에 넣어 내 개인적으로나 아이들 손에 들려 보낸 적이 없으니, 나는 촌지에 대해서는 떳떳하고 부담이 없다. 그 돈을 받고 부담스러워 할 선생님이 생각나는 것이다. 선생님도 자유롭다. 나를 길에서, 혹은 식당에서 만나더라도 서로 환하다.

일부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노골적으로 촌지를 요구한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리고 아이들이 선생님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집에와서 선생님을 나쁘게 이야기하면, 대개 엄마들은 그 진위를 확인해 보기도 전에 혹여 자신이 촌지를 건네지 않아서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닌가하고 지레짐작을 하는 경우도 있다. 세상이 몽땅 선도 아니듯이 세상이 몽땅 악도 아니다. 그걸 볼 때 모든 선생님이 촌지를 은근히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선생님이 완벽하게 촌지를 사양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엄마들만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런 부조리를 내 아이만 괜찮다면...하는 마음으로 덮어 두어야 하는 것인가. 서로서로에게 껄끄럼없이 편안한 관계가 되려면 서로가 서로에게 떳떳해야 한다. 결단코 돈으로 살 수 있는 문제가 아닌것이다.


오월을 며칠 앞두고 벌써 이 문제로 끙끙 거릴 엄마들이 있나싶어서..


바깥 풍경은 돈 없이도 너무나 밝고 환하다. 환희 그 자체이다.





전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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