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문자메시지 보낼 주소록을 삼십페이지 입력을 했다. 견디는 일이다. 열개의 숫자는 번갈아가며 내 눈앞에 나타나 내 손가락으로
옮아갔다. 때로는 손가락을 일센티미터쯤 덜 움직이게 배려를 해주는 숫자조합도 나왔다. 3229, 혹은 7444같은. 까딱 잘못하다간 배려에
황감해서 74444를 칠 때도 있다 그러면 <빽`스페이스>를 누르러 가느라고 손가락은 자판의 윗부분으로 허둥되며 이동을 했다. 이왕
<빽`스페이스>간김에 신이나서 또 두번이나 누를 때도 있다. 혀 끝에서 에이씨하며 한 마디 흘러 나온다. 이번에는 침착하게
<4>키를 누르고야 한 사람의 전화번호가 입력되었다. 배려를 즐기면 그렇게 깜박 선을 넘어가는 수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종일 천여명분의 주소를 입력하자 해는 지고 건너편 가학루 아래 대밭 사이로 저녁이 찾아왔다. 비가 조금씩 내리더니 갑자기
뒷샷시문을 와다닥 두드리며 소나기가 내린다. 봄비가 잦아 봄채소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어디 봄채소만 그리 자라겠느냐 포도순도 부쩍부쩍
자라겠지. 작년 이맘 때는 두이노의 식구들이 농활을 왔다
막걸리 한 말 받아놓고 청산리 벽계수야, 늦도록 그것들을 축내며 노래하고
이야기하다가 뙈약볕 아래로 그들을 내몰았다. 수박 한 쪽 엥겨놓고는 또 시침을 떼고 일을 시켰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매년 하는 나도
헉헉거릴 지경인데 머리털 나고 첨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고 고달펐을꺼나. 그래도 그들은 웃는 얼굴로 일을 했다.
꼭 돌시가
돌아왔다
나는 선거사무실에 앉아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그들이 일 년동안 살아 온 호흡들을 다시금 읽어본다. 견디는 일이다. 공허도 견디고
불같은 연애도 견디고 이별의 아픔도 견디고, 바람 앞에 산개하는 안개처럼 부질없이 해체된 그 무엇도 견디는 일이고....일이고.
그렇게
견딘 끝에 무엇을 보았을까.
전화번호 명단을 저만치 밀쳐놓고 주소록 화면을 아래로 내려놓고는 여기와서
일년 전 그
날의 웃음과 배터지게 푸르던 밭둑가의 녹음과 뫼르소가 아니래도 그 쏟아지는 햇볕에 꿩모가지라도 비틀고 싶던 힘들었던 시간을 되새김해본다.